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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빽-이도-삼병’의 병리(病理)
‘일빽-이도-삼병’의 병리(病理)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4.10.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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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정도가 살아서 숨쉬는 사회가 돼야

 
새로운 KB금융지주 회장의 유력 후보인 하영구 씨티은행장이 지난 16일 돌연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이날로 예정된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오는 27일 종합감사 출석으로 미루고 출국했다. 그래서 금융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 비상한 시국에 왜 해외로 나갔을까. 이날은 KB금융 회장추천위원회가 본선 후보를 4명 이하로 압축하는 날이었다. 이날 저녁 발표된 회장 후보군 4명에 그가 포함됐다. 하 행장을 제외하고 모두 내부에서 2년 이상 몸 담았던 인사들이다.
 
2차 후보중 유일한 외부출신인 하영구 행장은 20163월까지 남은 씨티은행장 임기를 뿌리치고 KB회장에 도전했다. 1981년 씨티은행 서울지점에 입행한 뒤 2001년 한미은행장에 발탁됐다. 한미은행이 씨티그룹에 인수된 후에도 한국씨티은행장으로 오래 재직, '은행장이 직업'이라는 말도 듣는다. 국내 금융권 CEO 중에서는 처음으로 은행장을 5번 연임했다. 하 행장의 임기는 오는 20163월까지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의 그가 정치적 풍향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여러가지로 극도의 예민한 시기에 부담스런 여론과 국감출석에 따른 소나기를 피하려고 돌연 출국카드를 선택했다는 해석이다이날 정무위 국감에서는 민감한 질문이 예고된 터였다. 하 행장은 미국 씨티은행 본사와 한국법인이 거액 자문료 계약 형태로 국부를 유출한 의혹과 관련해서 증인으로 채택됐다. 더군다나 그는 유력한 KB금융 회장 후보다. 이런 상황에서 껄끄러운 국감출석을 피하는게 상책이었을 법 하다.
 
지금 국회에선 국감이 한창이다. 세간에선 기업인들의 국감 출석 회피 방법으로 일빽(background)-이도(二逃)-삼병(三病)’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일빽은 연줄을 동원한 로비를 통해 빠져나가는 방법이고, ‘이도는 해외 출국, ‘삼병은 병을 핑계로 병원에 들어가서 국회에 불출석하는 것이다. 그만큼 기업 입장에서 사활을 걸고 국감 증인 채택·출석을 막으려 한다는 의미다.
 
요즘 법조계 주변에서는 대형 로펌들을 작은 정부라고 표현한다. 그 안에 전직 교도관부터 고위 관료까지 로펌 안에 이른바 없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대기업에서 정보 수집 목적으로 운영하는 대관(對官)팀도 비공식으로 운영한다. 또 이들의 힘은 정부로펌정부로 왔다 갔다 하는 역대 정부의 회전문 인사에서 나온다.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하는 적지않은 사람들이 퇴직 후 대형 로펌에서 수억~수십억원의 연봉을 받고 근무하다가 다시 발탁돼 들어온 까닭이다.
 
최근에는 변호사 수백명 씩을 거느린 로펌들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고위직 뿐만 아니라 실무직까지 싹쓸이한다. 법조계의 고질병인 전관예우가 사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법률서비스 분야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로펌들의 수익원이 사법에서 행정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입법 분야로까지 확장되는 추세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 대형 로펌들이 국회 국정감사에까지 영향력을 끼치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을 상대로 증인 컨설팅을 하면서 국감 증인 채택·출석·사후조치 등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로펌들은 명목상 의뢰인의 ‘위기관리(risk management)'를 이유로 입법부로까지 업무영역을 확장 중이다. 특히 증인채택 과정의 경우 고위 공무원 출신 로펌 고문·자문위원 등 갖가지 연줄을 총동원한다. 일종의 은밀한 로비 양상이다.
 
대형 로펌들의 국감 관여는 점차 이들이 국회의 의사결정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대로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소송을 해도 불가능한게 있으면 의뢰인에게 우리가 법을 바꿔드리겠다며 입법 시도를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후문이다. 최근 로펌들마다 앞다퉈 국회 사무처 직원, 의원실 보좌관, 정당 관계자들을 영입하는 것도 이같은 추세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을 쓴다고 국감에서 다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외 출장 등을 이유로 2012년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1,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이듬 해인 지난 해 결국 국감에 출석했다. 기업인의 국회 출석이 잘못된 기업 문화를 바꾸는데 기여한다’, ‘의미없는 망신주기다라는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이런 논란 속에도 나름대로 살길을 찾는 기업과 로펌들은 올해도 치열한 물밑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금융인인 하 행장은 개념상 기업인은 아니지만 국회증인으로 채택된 것은 기업인과 공통점이 있다. 만일 국감출석 회피가 목적이었다면 그가 선택한 것은 두 번 째 이도식 방법이다. 그가 로펌을 동원해서 일빽의 방법을 모색하고 강구했는 지는 모른다. 다만 해외로 출국하면 자동적으로 국감증인에서 빠진다. 국감출석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안성맞춤인 두번 째 방법을 선택했고, 일단 효과를 달성했음직 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이처럼 일빽-이도-삼병같은 편법과 반칙이 잘 통한다는 점이다. 이제 웬만한 사람이면 어느 수사기관에서라도 부를 때 일빽(로비), 이도(해외 도피)’를 해 보고 그래도 안되면 병원에 눕는다(삼병)는 것은 상식처럼 돼 버렸다. 이는 기업인 뿐 만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편법과 반칙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국가와 사회가 바로 서려면 원칙과 정도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많다. 오히려 기업인들이나 돈많은 사람들에게 일빽-이도-삼병을 합법적으로 알선하고 합법적으로 돈을 버는 로펌들이 대거 등장하고이대로 번성한다면 한국 사회의 크고 깊은 병리(病理)현상이 아닐 수 없다대형 로펌들은 국회 국정감사를 앞둔 기업인들에게 마지막 구명(救命)줄'과 같다고 한다. 기업이 자력으로 노력해서 안될 경우 로펌이 일종의 해결사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잘 아는 로펌들은 의뢰인인 기업의 요구를 달성하기 위해 사법부 고위직 전관 뿐 만이 아니라 정부 부처와 입법부 출신 고문·자문위원, 당료 출신들까지 총동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입법-행정-사법부가 온통 돈있는 사람들의 로비가 가능하고, 또 이 로비가 잘 먹혀드는 나라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근근히 먹고사는 서민들에게는 완전히 딴나라 세상의 얘기같은 일이다. 정의와 법질서는 간 데 없고 이른바 금권주의 또는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인 탓이다.
 
예전에 권위주의 정부 시절부터 국회의원들 사이에는 일해(一海)-이병(二病)-삼출(三出)’이란 말이 유행했다. 정치자금이 항상 필요한 국회의원들이 돈이 떨어져서 주머니가 비면 곧바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관계에 있는 기업이나 이익단체, 정부 부처에서 축 장도(祝 壯途)’라고 쓴 촌지봉투가 들어오기 마련이다그래도 돈이 궁하면 그 다음에 하는 수법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다. 해당 의원이 실제로 아파서 입원했는 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입원을 하면 해외출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기 쾌유(祈 快癒)’라고 쓴 촌지봉투가 병원으로 답지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 째 수법은 출판기념회를 여는 것이다. 본인이 직접 책을 쓰든 말든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열면 출판기념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상임위 유관기관이나 평소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해관계자들이 축 출판(祝 出版)’이라고 쓴 봉투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세가지 방법은 정치인들이 합법적으로 용돈을 버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첫 번 째, 두 번 째 방법인 해외출장이나 병원입원에 따른 수입은 예전보다 못하다고 한다. 의원들이 공식 해외출장이 아닌 개인적으로 외국으로 다닐 때 예전보다 노출되기가 쉽고, 아프지 않은데도 칭병(稱病)을 해서 무리하게 입원할 경우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출판기념회도 최근에는 합법적인 뇌물증여수단으로 지탄을 받게 되자 시들해지고 있다. 이래저래 낡고 진부한 고전적인 수법으로는 의원용돈벌기가 잘 먹히지 않는 세상이 된 듯 하다.
 
얼핏 보면 일빽-이도-삼병일해-이병-삼출과는 개념이 다르다. 그런데도 양자 간에 비슷한 점이 있다. 기업인이나 국회의원들이 뭔가 당면한 현실을 교묘하게 피해가거나, 흐릿하게 해서 목적을 달성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일반적으로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제일 싫은 일 가운데 하나는 범법행위 혐의로 검찰 등 수사기관에 불려나가는 것이다. 포토라인에 서서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이 TV에 나오는 것은 누구나 질색일 것이다. 그 다음이 국감 출석이다. 자기 기업 안에서는 황제처럼 군림하다가 국회에 불려나가 의원들의 호통을 들어야 하고, 이런 일들이 언론에 생중계가 되다시피 한다면 기업오너로서는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이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중요한 것은 정도와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어느 때보다도 전체적으로 공명정대한 사회가 돼야 한다. 대대손손 역사에 훌륭한 족적을 남긴 명문가에는 욕심에 대한 절제와 청렴 등 뭔가 특별한 것들이 있었다.
 
전국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인 환공(桓公, ?~BC 643)계영배(戒盈杯)’를 선호했다고 한다. 술잔에 70% 이상 술을 따르면 밑으로 몽땅 빠져 버리는 이 잔의 교훈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즉 '정도를 지나침은 도리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다. 사물은 중용(中庸)이 중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대제학을 가장 많이 배출하고 문과 합격자만 200명이 넘었던 명가 가운데 하나가 연안(延安) 이씨 가문이다. 이들은 넘침을 경계하라는 뜻의 계일(戒溢)’을 가훈으로 삼았다. 세조 때 대사헌을 지낸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은 만년에 성균관 서쪽 연못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수신(修身)했다.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듯 매사에 분수를 지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에서 조선 중기부터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이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증좌가 만석 이상의 재산을 쌓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다. 미움과 증오가 아닌 나눔과 배려로 주위를 밝게 만든 최씨 가문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과유불급'의 진리는 동서고금을 초월하는 좋은 말씀이다.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매사에 공명정대하며 마음에 한 점의 흐림도 없음을 군자삼락 중 두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러나 욕망에 일정한 제어를 걸어주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편법이나 반칙은 일단 편리하지만 습관이 되다 보면  타성적으로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면 공명정대한 사회는 물론 경제-사회적 정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경제-사회적 소외세력들로부터 민란이 발생했다. 재벌이나 기득권층이 일단은 불편하고 힘들 지 모르지만 매사에 원칙과 정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적당한 불편과 결핍이 오히려 현재의 상태(status-quo)를 유지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평범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국가와 사회에 원칙과 정도가 제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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