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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의 태극기 물결
광복 70주년의 태극기 물결
  • 허영섭
  • 승인 2015.08.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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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칼럼>광복 70주년을 보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도심 거리마다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된 것은 물론 고층 건물에도 대형 태극기들이 나붙었습니다. 아마 태극기가 아니었다면 광복 70주년의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던 70년 전의 우렁찬 만세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합니다.

이번 광복절 행사에는 이색적인 태극기도 많이 선보였습니다. 올해의 연수를 표시하는 2015개의 헝겊 조각을 하나씩 잇대어 만든 대형 태극기가 청계천에 등장했으며, 전문 작가들과 시민, 외국인까지 두루 참여해 만든 태극기도 내걸렸습니다. 서울시 청사 겉벽의 ‘시민 게시판’은 백범 김구 선생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그림으로 장식됐습니다. 그가 임시정부 주석 당시 벨기에 신부에게 글을 써서 선물했다는 태극기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태극기 그리기 플래시몹이 열려 박근혜 대통령도 직접 시민들과 어울렸고, 태극기 사진전도 열리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태극기 달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영업용 택시들이 태극기를 달고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유명 연예인 중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태극기 풍년을 이룬 경축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평소에도 과연 이처럼 태극기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것인지, 아니면 광복 70주년이라는 계기를 맞아 갑자기 높아진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과거 월드컵 경기 때처럼 태극기 열풍이 반짝하고 그칠 것인지, 계속 이어질 것인지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태극기를 둘러싼 논란이 이미 한 차례 가열됐다가 가라앉은 마당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아니, 영화가 아니라 그 장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언급이었습니다.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더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청와대 공식 브리핑을 통해 언론에 소개됐었지요. 더욱이 그 언급이 나온 자리가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였다는 점에서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장면이 오히려 지난날 권위주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의 반응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시작되어 노태우 대통령 당시인 1989년 1월까지 지속됐던 국기 하강식의 어정쩡한 광경이었던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던 조건반사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감이겠지요.

박 대통령의 언급 직후 행정자치부가 주축이 되어 태극기 달기 운동을 시작했으나 반발에 부딪쳤던 것이 그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난국 해결의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정부가 애국심을 내세워 위기를 넘으려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았지요. 계속된 경기 침체 속에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놓지 못한 상황에서 과거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데 대한 반응이었다고나 할까요.

이번 광복절 행사를 지켜보며 태극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인식이 어떤 수준에 위치해 있는지 궁금하게 여겨졌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있습니다. 정부가 여론 수렴 없이 지자체와 공기업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태극기 보급운동을 벌인 것을 두둔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폐지됐던 국기 하강식을 부활시키려던 움직임마저 엿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정부 시책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태극기에 대한 관심까지 젖혀둬야 할 것은 아닙니다.

애국심이란 강요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발휘되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들 합니다. 백번 맞는 얘깁니다. 태극기의 예를 들자면, 아무리 강제로 태극기를 달도록 유도한다고 해서 마음에 없는 애국심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국민들 각자가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상황에서 태극기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시책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제기됩니다.

물론 태극기를 내걸었느냐의 여부로 애국심을 따지려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반드시 애국심이 많다고 평가할 것도 아니지만 게양하지 않았다고 해서 애국심이 없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위 도중 태극기에 불을 붙이는 사건까지 일어나서는 올바른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 권위에 대한 도전과 거부의식이 지식인들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라 해도 넘어서는 안 될 한계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태극기를 접하는 태도가 퍼포먼스 위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소 인색하게 표현하자면, 대학입시에 필요한 스펙을 쌓듯이 퍼포먼스 참여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자체에 더 익숙해져가는 게 아닌가 여겨지는 것입니다. 외국과의 운동경기 때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이라고 외쳤던 것이 과연 애국심의 발로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애깁니다. 이번에도 곳곳에서 태극기 퍼포먼스가 열렸지만 감흥보다는 흥미 위주로 진행됐던 것이 그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손바닥만큼 작은 태극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얼마나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느냐 하는 진정성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이는 아무리 예쁜 얼굴에 태극기를 그린 인증샷을 인터넷에 올린다 해도 감동을 주기 어렵습니다. 태극기를 게양대에 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깁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가슴으로 울음을 터뜨리던 70년 전의 환호성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허영섭 동서남북'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필자   허영섭 / gracias1234@edaily.co.kr

 

언론인, 칼럼니스트.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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