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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4인 석호필을 아시나요?
민족대표 34인 석호필을 아시나요?
  • 고승철
  • 승인 2016.03.0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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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칼럼> 3.1 만세운동에 기여한 석호필(石虎弼)이란 역사인물을 아시는지? 아마 생소하리라. 그러면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라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스코필드 박사를 소개하겠다. 그는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이 땅에 왔다. 그러니 올해가 그의 방한(訪韓)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지 못하고 어느 농장에서 잡역부로 일했다.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숙식을 제공 받을 뿐이어서 미래가 암담했다. 이웃 목장으로 일터를 옮겨도 입에 풀칠하는 생활은 마찬가지였다. 병든 소를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목장 경험에서 얻은 성과였다.

  스코필드는 1907년 ‘기회의 땅’ 캐나다로 이민 갔고 농장에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토론토 대학교 수의과 대학에 입학한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다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총명한 청년 스코필드는 학사 학위에 이어 1911년엔 박사 학위까지 따고 앨리스 스코필드와 결혼한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올리버 알 에비슨 교장으로부터 한국으로 와 달라는 서신을 받고 1916년 가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이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는데 속성으로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했다. 석호필이란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석(石)’은 굳은 신앙심을 뜻하고 호랑이 ‘호(虎)’는 강렬하다는 의미, 도울 ‘필(弼)’은 한국인을 돕겠다는 뜻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 거사 준비 때 민족대표들과 만나 해외 정세 분석업무를 맡는다. 3월 1일 당일엔 탑골공원에서 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찍었다. 일본 헌병의 탄압 장면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 이 상황을 묘사한 그의 보고서 <끌 수 없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 일부를 살펴보자.

  <이갑성 씨의 부탁으로 사진촬영을 맡았던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는 빨리 움직이는데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인파는 더 큰 문제였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위 군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잡아야 했다. 어느 일본인 케이크 점 2층에 올라가 침실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베란다로 나가 급히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를 줄은 몰랐다. 파고다공원, 종로, 덕수궁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해 4월 15일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마을청년 30여 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스코필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현장으로 달려가 폐허가 된 마을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갇힌 여자 감방 8호실을 직접 방문해 그들이 고문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을 찾아가 엄중 항의했다. 그는 3·1 만세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만행을 해외에 폭로했다.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그는 ‘제34인’으로 불린다.

  그는 1920년 4월 강도를 가장한 암살미수 사건을 당하자 학교와의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인을 열심히 도왔고 1926년 한국을 일시 방문하기도 했다.

  1958년 국빈으로 초빙돼 한국에 온 그는 한국에 정착해 서울대학교에서 수의학을 가르치고 고아들을 돌보는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70년 4월 12일 그는 평소 소원대로 한국 땅에서 별세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지난 2월 22일 프레스센터에서는 ‘스코필드 박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이 열렸다. 행사장 한 구석에 앉은 필자는 참석자 200여 명의 얼굴에 그득한 열정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10대 소년 때 스코필드 박사를 만나 생활비, 학자금 지원을 받았던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그분은 친아버지나 다름 없었다”면서 “약자에겐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강조한 그분을 진정한 사표(師表)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약자(弱者), 빈자(貧者)를 사랑한 스코필드 박사의 정신이 이 땅에 오래, 활기차게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이 칼럼은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선사연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고승철 songcheer@naver.com )  
    소설가
 
    (전)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전) 동아일보 경제부장 및 출판국장
 
    
 
  저  서
    <소설 서재필> <은빛 까마귀> <소설 개마고원> 등 장편소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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