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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경제, 촌락 경제
골목 경제, 촌락 경제
  • 임종건
  • 승인 2018.07.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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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칼럼] ‘골목길 자본론’ 저서로 유명한 모종린 교수(연세대 · 국제대학원장)가 지난 주 안민포럼에서 ‘라이프스타일과 도시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들었다. 대로변이나 대형마트 백화점이 아닌 골목길의 작은 가게들에 도시의 미래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생각만 해도 훈훈하다.

그 골목들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고단한 인생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다. 거기에 장인(匠人)의 기술과 자본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입히면 골목경제가 되고 그것이 도시의 미래가 된다는 게 ‘골목길 경제학자’로도 불리는 모 교수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골목길 경제는 탈물질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물질주의 시대가 대도시, 대기업, 정부주도의 사회였다면 탈물질주의 시대는 개인, 중소기업, 소도시 중심의 사회다. 이 시대의 소비자를 일컬어 ‘라이프스타일 소비자’라 하고, 지역의 특색에 맞는 장인기업들을 유치 또는 발굴해 산업화를 이룬 도시를 ‘라이프스타일 도시’라고 한다.

라이프스타일 소비자들은 가격과 편리성, 유행 등을 따지며 자기를 표현하는 주체적 소비성향을 보여 온 이전의 소비자와는 달리,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회적 소비자이다. 그들의 심리의 기저에는 중세시대의 삶, 특히 장인정신(Artisanship)에 대한 존중이 있다는 것이 모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골목경제의 성공사례로 서울의 홍대거리를 먼저 든다. 홍대 앞과 합정동을 축으로 한 ‘홍합밸리’는 신촌 연희동 연남동 상수동 망원동 등으로 확장일로이고, 이태원과 한남동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지방에서도 경주 전주 대전 등에서 골목경제의 싹이 움트고 있고, 특히 제주도는 청정환경을 이용한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이처럼 도회지의 골목들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편에선 도시재개발이란 이름으로 골목동네들이 헐려, 대단위 아파트단지나 주상복합건물로 대체되는 현상이 지금도 대도시, 중소도시를 막론하고 지속되고 있다. 골목길경제는 그런 난개발에 대한 자성의 의미도 담겨 있을 터다.

그런 식으로 사라진 대표적인 골목 중의 하나가 서울 종로통의 피맛골이다. 임금님의 마차행차를 피하려고 생긴 골목이라 하여 피맛골인 그곳은 많은 사람들에겐 추억의 공간이다. 임금님 행차 때 대로변에 있다가는 무릎을 땅에 대고 엎드려야 했으므로, 피맛골 행인 중엔 절하기가 싫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순라길처럼 미로 같은 청진동 골목에는 낙지집을 비롯해 해장국, 뽈떼기탕, 족발, 모밀국수집 등 입맛 돋우는 음식점들이 빼곡히 들어차 점심때나 퇴근길의 샐러리맨들을 맞았다. 그런 가게들이 헐린 자리에 20층이 넘는 대기업 사옥이나 대규모 주상복합건물들이 들어섰다.

건물 밖의 통로에다 피맛골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구두 신고 갓을 쓴’ 몰골이다. 대형 건물의 아래층에 옛날 간판으로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지만 옛 정취를 맛보기는 어렵다. 그 골목이 남아있다면 지금쯤 골목길 경제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은평구의 옆동네에서 10여년 간 진행됐던 재개발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3층 이하의 주택이 들어선 동네에는 입구에서부터 골목이 갈라지는 코너마다에 구멍가게가 있었고, 이발소, 미장원, 쌀가게, 연탄가게, 방앗간 등등이 있었다.

동네가 사라진 뒤 1,200여 세대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세대 수는 동네 시절의 세대 수보다 적어지고, 생활여건도 더 쾌적해졌겠지만 등산길에 오가던 정겨운 골목길이 사라진 것은 나에겐 아쉬움이다. 그 동네 또한 골목길 경제를 살릴 공간으로 개발할 수는 없었던 걸까?

골목길 경제는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도 한다. 국도변에 위치한 나의 고향 동네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버스 정류소가 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이웃 동네의 학생과 장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주막, 구멍가게, 이발소, 다방, 농약방, 철물점 등이 영세한 촌락경제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을길이 개설돼 버스가 이웃 동네로 들어가면서 우리 동네의 유동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그것은 촌락경제의 퇴락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올 들어 마을 전체가 죽은 마을이 되었다. 4차선의 외곽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을 지나는 구도로의 차량 통행이 급격히 줄었다. 지나는 길에 찾아오는 외지 손님에 의존하던 촌락 경제의 숨통을 마저 끊은 셈이다.

물론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와 외곽도로의 개설은 교통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지방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되는 도로재개발이 촌락을 망가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음은 아이러니다.

도시와 지방을 잇는 시간과 거리의 단축은 지방의 발전보다는 피폐화에 더 기여한 면이 있다. 물체가 무거울수록, 물체 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무겁고 가까운 쪽의 인력이 커진다는 뉴턴의 법칙 그대로다. 대도시는 지방의 빈약한 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을 뿐이다.

촌락은 군청소재지로, 군청소재지는 도청소재지로, 도청소재지는 서울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한국적 자원의 흐름이었다. 이제 큰 것들이 작은 것들에게 돌려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다. 미래세대가 지향하는 중세의 삶은 도시의 골목과 함께 지방의 촌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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