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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 정치의 사망
십시일반 정치의 사망
  • 임종건
  • 승인 2018.08.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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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칼럼] 노회찬 의원의 죽음과 관련해 회자된 여러 말 가운데 노 의원이 죽었는데 살아 있을 정치인은 누구냐?”는 어느 정치평론가의 말이 나에게는 가장 통렬하게 들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살한 사건으로 정치인의 자살이 국민적 관심사가 됐지만 정치인의 자살은 현직이든 전직이든 흔치 않은 사건이다. 아마도 현직으로선 노회찬 의원이 최초가 아닌지 싶다.

특히 불법자금과 관련된 사건으로 자살한 정치인은 없다. 수없이 많은 정치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가고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등 패가망신했으나 그렇다고 자살하진 않았다.

사건이 들통났을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천편일률이다. ‘사실무근이다로 시작하여 기억에 없다를 거쳐 빌린 돈이다’ ‘대가성은 없다로 진행된다. ‘잡아떼기모드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한국정치에서 금전비리가 전혀 교훈 효과도 없이 고질화된 이유는 뭘까? 정치는 원래 남의 돈(후원금)’으로 하는 것이긴 하나, 한국 정치인들이 남의 돈 쉽게 생각하기는 직업병 수준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들통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것 같다. 다소 위험해 보여도 떡이 커 보이면 일단 먹고 보는 습성이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많은 후원자들로부터 소액의 후원금을 받아서 하는 정치를 권장하고 있다. 장사에서 말하는 박리다매(薄利多賣) 정치이자, 작은 정성을 모아 큰 정치를 하라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치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매점매석(買占賣惜) 또는 폭리소매(暴利小賣)의 정치를 선호한다. 1만명으로부터 1만원씩 1억원을 후원받기보다 한사람으로부터 1억원을 받는 후원이 편리하고 좋다는 것이다.

매점매석은 장사에서 효율적이긴 해도 대체로 불법이고 많은 소비자로부터 눈총을 받는다. 하물며 정치에서랴. 다수 주민의 이익보다 소수의 후원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정치인의 생명은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자금법은 정치인이 한 개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연간 후원금 한도를 500만원, 후원금 전체 한도를 15,000만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그 배까지)으로 하고 있다. 최저 후원금액 단위는 1만원이고, 110만원(연간 120만원) 이하의 후원금은 익명후원도 허용하고, 10만원까지는 세액공제도 해준다.

정치자금법이 이처럼 소액후원의 정치를 권장하는 이유는 불법청탁이 후원금 액수에 비례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1만원 또는 10만원 후원자의 청탁은 정치를 잘 해달라는 것이 고작일 터이나, 수천만원, 수억원을 거저 주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청탁을 목표로 고액을 후원한 사람은 나중에 목표가 이뤄지지 않으면 고발하거나 누설한다. 다만 고발자도 쌍벌죄로 처벌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정치인들로 하여금 불법이 감춰질 수 있을 것으로 믿게 하는 구석이다.

과거에는 집권자가 야당의원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돈 문제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 정치인들은 처벌을 받고도 민주투사인 듯이 큰소리쳤다. 이런 정치적 이용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금전비리에 대한 죄의식을 전반적으로 무디게하는 원인이 됐을 법도 하다.

십시일반의 정치는 한국정치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작년에 일반인이 중앙선관위에 정당을 지정하지 않고, 기탁한 정치자금은 40억원이 고작이었다. 의석비례로 정당들에게 분배되는 이 돈이야말로 청탁이 없는 후원금이다. 기탁자는 모두 43,500여명으로, 1인 당 기탁금액은 세액공제를 받는 10만원 미만이 거의 전부였다. 이것이 한국적 정치후원제도의 현주소이다.

차떼기 후원금에 대한 반성으로 기업과 단체의 후원을 금하자, 기업들은 여러명의 임직원들 이름으로 후원을 하게하는 이른바 '쪼개기'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작년 299개 국회의원 후원회가 모금한 돈은 540억 원이었고, 노회찬의원은 그중에서 34,246억원을 모금해 2위를 차지했다.

540억원 안에 쪼개기를 한 뭉칫돈이 섞여 있을지라도 외형상으로는 적법하게 모금된 돈이다. 문제는 거기에 올릴 수 없는 돈의 규모다. 그 규모는 사건이 터져야만 알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정치인들이 노 의원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는 저런 '재수 없는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십시일반 정치의 모범생으로 여겨졌던 노회찬 의원이 4,000만원의 뭉칫돈을 몰래 받았다는 것이 노 의원 죽음의 본질이다. 정치의 고비용 구조를 개혁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 현행 정치자금법이다. 또다시 정치의 고비용 구조를 들먹이며 이 법의 완화를 말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정면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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