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 사법부 ‘호가호위’를 되살리려면...
만신창이 사법부 ‘호가호위’를 되살리려면...
  • 김명서
  • 승인 2019.02.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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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공정성에 대한 신뢰 높여야...사법부 독립은 이를 실현하는 도구

[김명서 칼럼]‘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뜻으로 중국 전한시대의 고전 전국책(戰國策)에서 비롯된 말이다. 골자는 이렇다.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다. 그러자 여우가 호랑이에게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명을 받고 내려 온 사자(使者)로 백수의 제왕에 임명되었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봐라. 모든 짐승들이 나를 보고 달아날 테니...’ 호랑이는 여우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랬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로 모든 짐승들이 눈에 띄기만 하면 달아나기에 바빴다. 짐승들이 두려워한 것은 여우가 아니라 그 뒤를 따라오는 호랑이라는 사실을 호랑이는 몰랐던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호가호위’는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리는 사람을 비꼴 때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1908년 출간된 안국선의 신소설 ‘금수회의록’에서 여우는 이렇게 일갈한다. “남이 나를 죽이려 하면 어떻게 하든지 죽지 않도록 주선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 호랑이가 아무리 산중 영웅이라 하지만은 우리에게 속은 것만 어리석은 일이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온 묘책이라는 항변이다.

한 전직 대법관은 자신의 저서에서 ‘호가호위’ 고사를 소개하면서 “힘없는 여우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밀림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판사의 재판 행위도 ‘호가호위’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썼다. 헌법과 법률의 힘을 빌려 다른 사람과 사건들을 재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판관들은 뒤에서 따라오는 호랑이, 즉 헌법과 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랑이가 사라진 순간 ‘밀림의 고아’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법부는 어떤 상태일까. ‘밀림의 고아’는 고사하고 성한 데라곤 거의 없는 만신창이 신세다. 호랑이의 기운은커녕 밀림의 만만한 ‘호구’나 다름없다. 발톱을 내밀며 사납게 달려드는 상대의 공격에 상처투성이 상태로 마냥 웅크리고 있다. ‘사법농단 사태’라는 초대형 태풍이 몰아친 이후 나타난 사법부의 현주소다.

재판장에 대한 인신공격은 사법권 뿌리 흔드는 심각한 위협

사법부 구성원이라면 입술을 깨물었을 법한 치욕적 상황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1심 선고 직후 여당에서 나왔다. 김 지사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자 “사법부 요직을 장악한 양승태 적폐사단이 조직적 저항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성창호 부장판사에게 초점을 맞춰 “양승태 키즈”, “판사의 경솔함과 오만, 무책임과 권한 남용” 등 인신공격적 비난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판결 내용 뿐 아니라 담당 판사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이는 사법권의 뿌리, 즉 판사들의 존재 이유를 뒤흔드는 심각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사법부 구성원들이 느끼는 충격과 반감, 위기감은 컸던 것 같다.

전후 상황은 다르지만 특정 판사를 겨냥한 이런 방식의 노골적인 비난은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진보성향 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47명을 ‘적폐 판사’로 지목하면서 대형스크린으로 해당 법관들의 얼굴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은 ‘양승태 사법부’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 말고, 개인별 불법 또는 부당 행위가 구체적으로 보도된 적은 거의 없다. 여당은 사법농단에 관련된 탄핵 대상 판사들의 명단을 조만간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은 지극히 미온적이다. 정황상 경고에 가까운 유감 표명 정도는 나올 법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부터가 원론적 입장 표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을 기소한 직후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법관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구조적인 개혁을 이뤄내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메시지는 없었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진보든 보수든 기득권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게 사법부의 현실”

하지만 사법부 독립에 대한 목소리는 법원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대개의 문제들이 사법 독립을 침해받았기 때문인 일어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런데 신평 경북대 로스쿨 교수의 견해는 다르다. 판사 출신인 신 교수는 “사법부는 ‘사법의 독립’을 내세우며 수십 년간 끊임없이 외부 간섭을 배제한 채 권한확대를 꾀해 왔다”고 지적했다. 권한 확대는 ‘기득권 확대’도 포함한다. 그가 척결 1순위로 꼽는 문제의 기득권은 ‘관선 변호’와 ‘고문 판사’. 법관이 선배나 동료 법관에게 사건 청탁을 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신 교수는 “진보든 보수든 기득권으로 똘똘 뭉쳐서 절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게 사법부의 현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은 사법부 불신 시대다. 통렬한 자기반성이 없으면 불신 상황은 계속되고, 그 만큼 법치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불신을 줄이려면 신 교수가 지적한 기득권의 포기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청탁과 압력을 배제하고 오로지 법에 따라 재판하겠다는 법관들의 단호한 결의도 절실하다.

“재판관 면전에서 표시되는 존경은 추호라도 재판관 개인의 학식과 인격과 덕망 때문이 아니다. 재판관의 배후에 헌법과 법률, 그에 터 잡은 재판제도가 힘을 발하기 때문이다” 전직 대법관의 말이다.

힘없는 시민들이 기댈 곳은 법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공정한 재판’을 실현하는 도구로 쓰일 때만 의미가 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진다면 법관의 파워, ‘호가호위’의 위세는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필자 소개>

김명서(clickmouth@hanmail.net)

-전 서울신문 정치부장, 사회부장, 논설위원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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