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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비상 속 ‘헬리콥터 머니’와 이주열 한은 총재의 선택
코로나 비상 속 ‘헬리콥터 머니’와 이주열 한은 총재의 선택
  • 정종석
  • 승인 2020.03.2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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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은 운전시 사이드 브레이크 잡은 운전강사 역할...'프레임 전환' 속에서도 독립성 지켜야

[금융소비자뉴스 정종석 대표기자] 최근 미국 정부가 내놓은 대대적 현금지원책을 경제학에서는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로 일컫는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무차별적으로 현금을 살포한다는 의미다.

헬리콥터 머니는 미국의 통화학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1969년 ‘최적화폐수량(The Optimum Quantity of Money)’ 논문에서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

침체에 빠진 경제의 생산과 물가상승률을 높이기 위해 중앙은행이 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현금을 뿌리는 것이라는 게 기본 아이디어다.

현대에는 정부가 세제혜택을 주거나 중앙은행이 자산매입으로 시장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 같은 간접적 수단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처음에는 정부가 국민 개인에게 현금을 나눠준다는 더 직접적 의미로 사용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연방준비제도를 이끌었던 벤 버냉키 전 의장은 기존 간접정책으로 부족하다며 헬리콥터머니를 강화하자고 주장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국민들에게 실제 현금을 나눠주지는 못했다.

한국은행이 오는 4월2일부터 3개월 간 금융기관에 자금을 무한정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언론에서는 사실상 한국판 양적완화를 시행하기로 했다. 한은은 이를 양적완화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미국 등이 시행하고 있는 양적완화는 성격이 다르다고 굳이 '사족(蛇足)'을 달았다.

한은, 3개월 간 매주 정기적으로 환매조건부채권(RP)를 매입해 전체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 없이 공급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한은이 3개월 간 매주 정기적으로 환매조건부채권(RP)를 매입하여 전체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 없이 공급한다는 것이다. 양적 완화는 이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경제주체에게 바로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시장 금리를 더욱 떨어뜨리는 방법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이번 한은의 조치는 양적완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은은 환매조건부채권(RP)를 매입, 전체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 없이 공급하기로 했다. 자산을 직접 매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한국은 아직 기준 금리가 0가 아닐 뿐만 아니라, 환매조건부채권의 매입은 담보를 받고 단기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각국의 중앙은행은 보수적인 속성을 갖는다. 중앙은행 총재의 덕목이라면 ‘안되는 일은 절대 안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경제 운전에서 마치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고 있는 운전강사와도 같은 역할이어서다. 중앙은행이 나서서 신속하게 경제를 운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막는 일종의 ‘최후의 방패’ 역할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whatever it takes)’를 하겠다는 선언이 전 세계 금융시장의 공포를 잠재우는 데 일단 중요한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앙은행이 금융 안정의 최후 보루이자 최종 대부자(the last resort of lender)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이에 반해 코로라 사태에 대한 한국은행의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이주열 총재의 행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도 코로라 공포에 파랗게 질려 금융시장이 붕괴 직전까지 갔는데도 한은의 존재감이 미미했다는 것이다.

한은법 규정을 이유로 난색을 보인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매입 문제도 한은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국책은행에 대한 자본금 출자 등 여러 우회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은행과 이주열 총재, ‘양적완화’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하는 편이었으나 최근 기류 급격히 변화

실제로 한은은 2016년 조선·해양산업 구조조정에 이런 방식으로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어 ‘한국판 양적완화’를 한 경험이 있었다. 평상 시에도 한은 통화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진 가운데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한은의 몸 사리기와 우왕좌왕이 도를 넘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이주열 총재를 탓할 수 만은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원래 중앙은행 총재는 ‘고독한 자리’다. 정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 위상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에서 그렇다. 중장기 안목을 요구하는 통화정책이 정치권력의 조급증이나 시장의 탐욕에 휘둘리면 실패하기 십상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은행은 ‘양적완화’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하는 편이었지만 최근 기류가 급격히 바뀌었다. 이주열 총재는 첫 번 째 임기 때만 해도 “통화정책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며 구조조정과 경제체질 강화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지난해 11월 국회 국정감사 자리에서는 “양적완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깜짝 발언했다. “제로금리가 반드시 기준금리 하한선인 것은 아니다”며 마이너스 금리 가능성을 시사한 금융통화위원마저 등장했다.

정부가 쓰는 돈을 중앙은행이 바로 화폐를 찍어 제공하는 것이 헬리콥터 머니다. 정부의 지출은 국민 모두가 돈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낳는다. 이를 중앙은행이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행이 국민들에게 가가호호 돈을 나눠주는 셈이다. 이를 빗대 공중에서 돈을 뿌리는 헬리콥터 머니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다.

한국의 구조조정 자본 확충 펀드가 바로 이런 헬리콥터 머니와 다를 바 없다. 정부가 11조원의 펀드를 조성한다지만 이 가운데 10조원을 한국은행이 조성한다. 무자본 특수법인인 한국은행이 돈을 버는 기관이 아니다.

이번 코로라 사태 속 중앙은행-정부 협력 필요한 시대...특단의 예외적 조치는 비상시기 안에서만 시행해야

결국 10조원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한은이 여기에 대해 미리 한도만 확보해 놓은 것이라고 애써 선을 긋는 것은 보수적 체질이 이유다.

여기에 이주열 총재의 크나큰 고민이 있을 것이다. 이 총재는 37년 간 한은에서 근무한 정통 한은맨이다. 그는 전임자 김중수 총재처럼 외부로부터 온 낙하산도 아니고 체질적으로 보수적인 한은의 역사와 전통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그동안 국회 등 대외활동에서 “중앙은행과 정부 양쪽의 간극을 줄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수적인 한은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계에서는 인류가 권력에 의한 돈의 타락을 경험한 끝에 얻은 지혜가 ‘중앙은행의 독립’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전례가 드문 이번 코로라 사태 속에서 지금이야말로 중앙은행이 정부와의 대립이 아니라 협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주장도 나온다.

지금 전 세계적인 코로라 비상 속에서 경제성장과 고용증대 같은 시대적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이주열 총재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되 정부와 협조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프레임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다만 특단의 예외적인 조치는 비상시기 안에서만 시행하도록 단서를 달아 한은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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