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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 파산과 섣부른 정책결정...“이럴 줄 알았으면, 가만둘 것을”
한진해운 파산과 섣부른 정책결정...“이럴 줄 알았으면, 가만둘 것을”
  • 권의종
  • 승인 2021.09.1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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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해운업 시장은 지금 활황 국면...정부, 올 6월에 '해운산업 리더 국가 실현전략' 발표
실패는 경험을 넘어 경륜이 돼야...명품 정책에는 ‘빨리빨리’보다 ‘만만디’가 더 잘 어울려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명품이라 불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학세계도 마찬가지다. 싸구려 소설과 좋은 작품을 구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양자의 차이는 의외로 사소하다. 흥미진진한 사건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주로 달려있다. 만화는 대개 네 번째 칸마다 웃음거리를 선사한다. 품질 낮은 작품은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한번 맛 들이면 눈을 떼기 어렵다.

반면, 좋은 문학작품을 즐기려면 상당한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당장은 재미가 없어도 앞으로 등장할 드물면서도 감동적 사건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지루해도 도중에 그만두면 안 된다. 긴 문단과 문장을 한땀 한땀 인내하며 읽어가야 한다. 명화나 명곡 감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기다림의 미학은 정책에 더 긴요하다. 목전의 어려움을 못 참고 정부가 성급히 시장에 개입하면 탈이 나곤 한다. 최근 벌어지는 물류난을 보노라면 5년 전 한진해운의 악몽이 떠오른다. 누가 이럴 줄 알았으랴마는 파산 결정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그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코로나19로 억눌린 소비가 급증하면서 운송 창고 인력 등 물류 전반에 걸쳐 병목 현상이 빚어지며 산업이 궁지에 내몰려 있다.

최근일 기준 주간 해상 컨테이너 운임지수(FBX)는 1만519달러의 사상 최고치로 치솟았다. 불과 1년 전 2,032달러와 비해 5.1배 올랐다. 중국 등 아시아에서 북미 동부지역으로 컨테이너를 운반할 때 드는 해상 비용이 40피트 상자 기준 평균 2만615달러에 이르렀다. 1년 만에 7배 가까운 상승이다. 물류비용 급등이 원자재 가격 폭등과 함께 공급 부족 사태를 야기, 기업의 수익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옥죄고 있다. 수주도 어렵거니와 수출을 해도 남는 게 없다.

명작과 명화, 명곡을 즐기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기다림의 미학’은 정부 정책에 더 긴요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과거지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6년 파산하기 전의 한진해운이 어떤 기업이었나. 국내 업계 1위이자 세계 7위의 업체였다.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였다. 한진해운이 파산하고 나서 국내 업계 1위가 된 HMM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한진해운에 못 미친다. 그사이 세계 해운업 시장은 활황 국면에 접어들었다. 글로벌 해운 운임이 연속해서 최고가를 경신하며 유례없는 해운업 호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진해운 파산을 결정할 당시에도 반대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1위의 한진해운을 파산시키고 현대상선을 지원하는 결정에 의아해 했다. 현대상선이 한진해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합병하고 합병 후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여론과 의견은 정부의 성급하고 근시안적 결정에 뭉개졌다.

한진해운이 파산에 이르게 된 데는 당해 회사 경영진의 잘못이 크다. 여기에 정책실패도 단단히 한몫했다. 의사결정이 신중하지 못했던 정책당국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글로벌 네트워크인 해운업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한진해운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다. 파산에 따른 국가적 손해가 얼마인지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소홀히 한 책임 또한 면하기 어렵다.

정부는 늘 뒷북이다. 꼭 일이 터지고 나서야 호들갑을 떤다. 이번 역시 해양수산부가 뒤늦게 나섰다. 지난 6월에야 '해운산업 리더 국가 실현전략'을 발표했다. 2030년 국적선사의 원양 컨테이너 선복량을 150만TEU까지 끌어올리고, 지배 선대 1억4,000만DWT(중량톤수) 이상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해운 매출액을 70조 원 이상으로 늘려 한진해운 파산 이전의 K-해운을 재건하는 목표를 세웠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경제...정부의 역할, 즉 ‘보이는 손’은 제한적이어야

정부가 조선 강국으로 재도약을 위한 청사진도 내놨다. 2030년까지 세계 친환경 선박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을 75%까지 끌어올려 압도적 1위를 굳히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자율주행 선박, 무탄소 선박 등 미래 선박 분야에서도 국내 조선업체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4,00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치는 철이 없다. 여당 대표는 박근혜 정부 때 한진해운이 파산된 사실을 적시하며 발뺌이다. 문재인 정부는 해운·조선산업 부흥을 위해 8조 원 기금을 만들어 해양진흥공사를 만들고, 컨테이너선 20척을 발주해 HMM에 지원했음을 내세운다. “HMM 선복량이 회복되고, 한국형 해운선사동맹 'K-얼라이언스'가 결성됐다”며 “코로나19 와중에 많은 화물량의 증가에 때를 맞춰 HMM이 급격히 성장하고 큰 수익이 나오게 됐다"고 자랑한다.

위기 대응 노력을 말하기에 앞서 애초 위기가 안 생기게 해야 했다.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정부가 섣부른 조정으로 실패를 자초한 꼴이 되었다. 서둘다 보면 실수는 흔히 생기는 법. 문제는 이를 바로 잡으려면 적잖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소요되는 점이다. 필요할 때 정부 개입은 당연하다. 그때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끼어들다간 낭패당하기에 십상이다. 구태여 순위를 매기자면 시장이 우선이고 정책은 나중이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시장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인다. 누가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자율 작동한다. 이론의 여지는 있으나, 정부의 역할 즉 ‘보이는 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때에 한해서다. 정책도 잘못될 수 있다. 하지만 반복은 곤란하다. 실패가 경험에 그치면 발전이 없다. 미래를 위한 경륜이 돼야 하고 그러려면 진중함이 필수다. 명품 정책에는 ‘빨리빨리’보다 ‘만만디’가 더 잘 어울린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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