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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스톰’의 위기, 지금처럼 허약 재정으론 감당 힘들다
‘퍼펙트 스톰’의 위기, 지금처럼 허약 재정으론 감당 힘들다
  • 권의종
  • 승인 2021.10.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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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증가 일로...민간 부실 커지고 신용경색 심해지는 위기 상황에서 재정은 최후 보루

세상에 안 갚아도 될 빚은 없어...비상약은 비상용일 뿐, 상복(常服)하다 상복(喪服) 입을 수도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부채의 화폐화(bond monetization)’가 논란이다. 부채의 화폐화는 재정 당국이 발행한 적자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해 주는 정책을 말한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정부 씀씀이를 뒷받침하는 것을 뜻한다. 재원의 원천이 부채라는 것과 시장이 아닌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나서는 게 특이점이다.

비상 상황에서 다른 정책이 소진되었을 때 활용될 수 있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할 때 동원 가능한 수단이다. 화폐 가치 하락과 중앙은행 신뢰도 등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어 주요국 중앙은행이 금기시한다. 한국은행 역시 부정적이다. 지난 2월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손실보상 등을 위한 재원 마련으로 중앙은행의 국고채 직매입 방안이 거론되었을 때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한은 총재는 단호했다. 국채 매입에 대해 “정부부채 화폐화 논란을 일으켜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 중앙은행 신뢰 훼손으로 이어져 대외 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주요국에서는 중앙은행의 국채 직매입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지난 1995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직접 인수를 실시한 사례는 없다”고 못 박았다. 대신, 유통시장에서의 국채 단순매입 등 시장안정을 위한 역할을 충실히 할 것임을 강조했다.

대선을 앞두고 부채의 화폐화가 다시 들먹인다. 가계소득을 불리기 위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대선후보도 있다. 그는 “국가의 가계 이전소득 지원으로 가계소득을 늘려 가계부채를 줄이고 재원은 금리 0%인 영구채로 조달하자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편 대학 교수를 자신의 대선캠프 정책조정단장으로 위촉했다.

대선 앞두고 ‘부채의 화폐화’ 논쟁 조짐... 화폐 가치 하락, 중앙은행 신뢰도 저하 경계해야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가계소득을 늘리는 방안이야 고려될 수 있다. 다만, 숙고가 필요하다. 가계빚은 갚아야 하고, 정부가 한은에 진 빚은 금리가 무이자이고 만기가 무제한이라 안 갚아도 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착각이다. 부채의 화폐화는 가계부채를 정부가 떠안는 것에 불과하다. 채무자 명의만 가계에서 정부로 바뀌는 꼴이다. 세상에 갚지 않아도 될 빚은 없다. 어떻게 포장하든 빚은 빚이다. 국가부채 역시 결국은 후대가 상환해야 할 채무다.

가계빚이 많기는 하다. 올 2분기 가계부채가 1,805조9,000억 원에 이른다. 더 큰 문제는 유례없이 빠른 증가 속도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올 1분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전 분기 대비 1.5%포인트 증가한 104.9%를 기록했다. 증가세가 비교 가능 43개국 중 2위다. 작년 4분기에는 증가율이 1위에 올랐었다. 채무상환 부담도 늘었다.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72.4%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10.1%포인트 증가했다.

가뜩이나 고(高)부채인 구조에서 갑작스럽게 금리를 올리거나 대출을 무리하게 조이면 어떻게 될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에 피해가 집중됨으로써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경기둔화가 가속화될 수 있다. 가계빚보다 무서운 게 나랏빚이다. 1,000조 원에 이르는 국가부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가부채도 쓸모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계 각국 정부가 은행, 기업, 가계의 부실을 떠안는 방식으로 고비를 넘겼다. 정부가 빚을 내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푼 게 주효했다. 미국과 유로존 국가들에게는 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 방만한 복지 운영으로 재정이 취약했던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은 되레 극심한 재정위기를 겪어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디폴트는 면했으나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단의 정책은 실패의 개연성 커...비상 처방에 한하고, 호전 기미 보이면 출구 전략 세워야

한국도 국가부채를 잘 활용했다. 그 덕에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신속하고 과감한 재정 투입을 통해서였고, 이를 양호한 재정건전성이 뒷받침했다. 2008년 당시의 국가채무는 309조 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26.8%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국가채무 규모와 GDP 대비 비율이 각각 2011년 420.5조 원, 30.3%에서 2020년 846.6조 원, 43.8%로 높아졌다. 내년에는 1,068조 원, 50.2%로 전망된다.

재정은 민간 부실이 커지고 신용경색이 심해지는 위기 상황에서 최후의 보루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재정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정부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재정 확장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이어진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도 적자재정을 편성해 노인 일자리, 아동수당 확대, 청년수당, 재난지원금 등을 지급해온 결과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더 많은 청구서가 한국 경제를 향해 날아들 것이다.

바닥을 보이는 고용보험기금, 고갈이 예상되는 건강보험기금의 적자를 메워야 한다. 한동안 방치해온 국민연금 개혁도 더는 미루기 어렵다.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코로나 대출 리스크 또한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없다. 글로벌 금융긴축으로 자산 가격 거품이 꺼지는 위험 등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상황까지도 대비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재정의 몫이다. 지금의 허약해진 재정으로 예측불허의 다중 위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엎친 데 덮친다고, 대선과 맞물려 선심성 정책마저 그칠 줄 모른다. 고삐 풀린 나랏빚은 가만 놔두고 가계빚만 잡으려 한다. 정책에는 양면성이 있다. 의도대로 효과가 나오면 좋으나, 예상 못 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단의 정책일수록 정부 실패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부채의 화폐화도 꼭 필요할 때만 일과성 처방에 그쳐야 한다. 호전 기미가 보이면 즉각 출구 전략을 가동해야 한다. 비상약은 비상용이다. 상복(常服)하다 상복(喪服) 입을 수 있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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