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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함께 치곡(致曲)을!
스승과 함께 치곡(致曲)을!
  • 김영죽
  • 승인 2021.12.1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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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죽 칼럼] 애매한 나이, 애매한 경력, 그리고 애매한 공부.

필자의 현재를 규정하는 좌표이다. 공자는 40에 불혹(不惑)이라 했는데, 이 때 만큼이나 공부하는 주부를 흔드는 구간이 또 있을까 한다. 하지만 버틴다. 세상의 수많은 경력단절 여성들, 공부하는 엄마들은 나름의 ‘버티는’ 방법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나의 위치가 이토록 희미한데, ‘광장에서의 공공의 논의’가 과연 가능할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우려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시대, 이 공간을 살아가는 애매한 내가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인생길에서 40대, 50대란 흔히 말하는 ‘코어(core)’에 해당한다. 삶의 근육을 키워나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나와 같은 범인(凡人)은 어떤 선택을 해야 그나마 하우(下愚)의 삶을 면하게 될까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그러다가도 내 스승들의 일상에서 그 실마리를 마주하게 될 때면, 불안함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치곡(致曲)이다! <역린(逆鱗)>의 현빈 만이 웅얼거릴 수 있는 대사가 아니다. 사람으로서 도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힘, 삶의 어려운 구간을 넘어가게 하는 동력이다.

치곡, 삶을 바꾸어가는 흔적

사실, ‘치곡’이란 말은 생활에 스며야 마땅하지만, <중용>에 갇혀 어마어마한 무게감만 따로 노닌다. 이 두 글자 속에는 나로부터 타자와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그럴 만도 하다. 허나, 이 역시 스텝 바이 스텝. 단 한 번도 선현들은 엽등(?等)을 권한 바 없다. 자신의 삶을 바꾼 흔적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손 안에서 전 세계 모든 정보가 찰나에 바뀌고, 시비의 기준 또한 어지럽다.‘마음의 상처’가 ‘마상’으로 던져지는 언어의 경제성을 목격할 때, 70년대 생 아줌마는 한 번 더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보폭과 짜릿한 감각으로 이 시간대를 따라가야 하느냔 말이다.

물론, 반문(反問)이 따를 수도 있다. 유사 이래 이처럼 빠르고 섬세하게 사소함이 대두된 적 있던가, 이처럼 투명한 담론의 장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적이 있던가, 그 편의를 그대도 누리지 않는가라 한다면 주춤할 것이다. 그래도 달갑지는 않다. 그 ‘사소함’이란 것이 자신을 위한 검증으로 쓰이는 미담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치곡’을 강(講)하고 논(論)하던 독서사인들은‘사소함에 정성을 다하라’는 메시지가 이처럼 홀대 받는 시절이 올 줄 예상했을까?

삶이란 마치 가마솥 밑의 검댕처럼 홀연히 생긴다(?장자??잡편?)라 했으니, 스스로 태어남의 순간에 개입할 여지란 없다. 그렇다 해도 비교적 괜찮은 흔적을 남기며 가는 건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라 위안이 된다.

문제는, 치곡을 혼자서 잘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나의 앎과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스승이 있고, 그들 곁에서 더디게나마 촌보라도 나아가고 있다면, ‘사소함에 충실할’준비는 갖춘 셈이다.

스승을 찾아서

대선이 코앞이고, 여전히 집값은 잡힐 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우활(迂闊)한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결국 정치든 그 무엇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니 ‘주제’보다 ‘주체’에 꼼꼼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한 인간으로서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독행(獨行)’의 시기라고 하지만, 우린 여전히 무리 안에 존재한다. 그렇다 치면 가장 다정한 인류가 살아남았다고 하는 생물학자들의 평은 적실하다.

다정해서 살아남았다니, 가슴 설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일세의 통유(通儒)들은 정스럽고 겸손하며, 세심했다. 퇴계가, 다산이 그러했음은 우리 모두 안다. 다만, 내게도 그러한 스승이 있을까 돌이켜보는데 시간을 내지 않을 뿐이다.

다산포럼에 참여하며 혹여나 아포리즘을 향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닐지,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기필(起筆)했다. 세상 재미없는 이야기가 ‘나는 못해도 너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만 한다’라는 자기(自欺)의 충고이다.

나의 존경하는 스승들은 담담하게 일상의 치곡을 행하시느라, 제자를 박절하게 대할 여유가 없다. 그러니, 내 스스로에게 직접 말 하는 수밖에.“너나 잘해라!”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김영죽(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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