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와 살아 있는 실학
실사구시와 살아 있는 실학
  • 김진균
  • 승인 2022.02.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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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 칼럼] 실사구시(實事求是)는 현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말로서 오늘날 실학(實學)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말이다. 그런데 교과서에 실린 내용처럼 간단하게 정리되기까지의 과정이 간단치 않다. 여기에 시대적 요청에 대한 학문적 대응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실학은 개념상 허학(虛學)의 반대말인데, 유학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적도 있었다. 전근대 유가는 불가나 도가를 헛된 망상을 좇는 허학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학문만이 실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실학이라고 했던 것이다. 근대적 실학 개념이 정립되어가던 1958년 한우근은, 주자의 성리학도 실학이라고 불렸는데 이제 와서 연암과 다산의 학문을 탈성리학적 경향으로 해석하면서 의연히 실학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근대적 실학 개념을 구사한 초기 사례는 최남선이 『조선역사강화』(1930)에서 사용한 “실학의 풍”에서 볼 수 있다. 이후 현실학파(백남운), 경제학파(현상윤), 실증학파(홍이섭) 등의 용어들이 등장해 경합하다가 해방 이후 실학으로 정리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실학에서 “실”의 의미가 현실이냐 실천이냐 실용이냐 실증이냐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복잡한 맥락을 다잡아 “실사구시”의 학문방법론으로 실의 의미를 확정한 논문이 이우성의 「실학연구서설」(1973)이다.

실학은 개념이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민족과 근대를 추구한 것으로 해석되던 실학은 사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빚어진 학자들의 허구라는 김용옥의 주장이 20세기 말 매스컴을 통해 지식대중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하였다. 실학이 본디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본디부터 있던 학문은 없다. 모든 학문이 구성되어 왔다. 실상 모든 인문적 현상은 구성되어 온 것이고, 실학도 현실을 통해 구성되어 온 것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방법론이던 실사구시가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 대응 자세로 전환되어 해석된 것도, 연암과 다산의 문장에서 중세 보편주의에 저항하는 근대적 민족주체성을 해석해낸 것도 모두 우리 근대사의 현실을 관통하며 구성되어 온 것이다. 식민지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발생한 현실적 요청에 20세기의 학계가 실사구시적으로 대응한 결과물이 오늘 우리가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실학이다.

지금은 실학을 주제로 내걸거나 실학자들을 기리는 박물관과 기념관도 제법 많아졌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주관하는 관련 행사도 적지 않아, 21세기는 실학의 융성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근대적 실학 개념의 정립 과정을 되짚어보면, 오히려 이제부터 실학이 교과서에 박제된 형태로 혹은 박물관의 전시물로 남아 학생들의 따분함만 야기하게 될 듯하여 못내 아쉽다.

조선후기의 비판적 지식인들을 근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한 것은 20세기의 학자들이었다. 자기 시대의 식민과 분단과 전쟁과 불평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일군의 학자들의 학술적 양심이, 현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의 근대적 실학 개념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우리는 실학을 말하면서, 20세기의 과거에 매달려서 박제된 담론을 추억하는 것으로 안전하게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21세기의 현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것만이 21세기의 실학을 살리는 길일 것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국가 제도가 이 모양이라면 조선은 곧 망할 것이라고 절규하던 18년의 유배객 다산 정약용을 다시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김 진 균 (다산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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