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민주화의 선후 관계 : 한국의 교훈
산업화와 민주화의 선후 관계 : 한국의 교훈
  • 임정덕
  • 승인 2022.07.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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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덕 칼럼] 한국은 지난 세기 이후 최단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세계 유일의 국가다.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은 아직까지도 이 중 하나도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이 이미 선례를 보였으므로 다른 후발국들도 따라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봄직도 하다. 두 가지의 동시 달성이 어렵다면 그 이행 순서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먼저 산업화와 민주화의 척도를 정의해야 한다. 산업화는 모든 국민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 발전 수준과 이를 위한 적정 성장률 이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면 별문제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 수준(예를 들면, 2만 달러 내외) 이상의 국민소득 달성도 기준이 될 수 있다. 민주화는 인권이 보장되고 확실한 자유·평등 선거에 의한 정권 선택과 교체가 가능하고 실천되는 단계에 이르는 수준으로 정의할 수 있다.

모든 후발국이 이 두 가지를 빠른 시간 내에 동시에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선후를 굳이 가려야 한다면 어떤 순서나 관계를 제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론이나 실험을 거쳐 증명하기는 어려우며 한국 같은 선례나 다른 경험적 결과를 참고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이 본격적 산업화 단계 이전에 민주화부터 시작했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4·19 민주화 의거 직후에 산업화의 시발점이 된 5·16 쿠데타가 없었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인가?’의 질문이다.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한 세대는 “불가능!”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4·19로 이룩한 민주화 시대의 혼란상은 경험해 본 세대는 확실하게 안다. ‘데모공화국’이라는 달갑잖은 명칭이 생기고 데모대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정권 축출에 성공한 민의의 걷잡을 수 없는 분출이었다.

산업화 전에 확실한 민주화부터 이룩된 사회라면 국민 각 계층의 다양한 욕구에 대해 “산업화가 완성될 때까지는 참고 견디며 일단 내일을 기약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민주적 선거 과정에서 저마다 투표권을 휘두르며 자기 몫부터 챙기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게 뻔하다.

산업화 자금 조달을 위한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는 민선 정부라면 불가능한 시도였다.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된 1972년 8·3 사채 동결 같은 극단적 조치는 군사 정권이라 가능했다. 도시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부터 일방적으로 설정한 획기적이자 선제적인 조치는 지도자의 안목이 먼저이지만 그 실행 여건도 중요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 중 하나로 벤저민 프리드먼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의 이론을 들 수 있다. 그는 민주주의, 개방, 관용 등 도덕적 가치와 경제 성장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역사적으로 경제 성장과 소득 상승이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뒷받침하지만 그 반대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갈파했다. 현실적으로 20세기 이후 세계에서 민주화가 선행하면서 산업화를 이끈 전례가 없다.

김태유 서울대 교수 등도 산업화에 성공하지 않고는 자유, 평등, 박애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가 실현될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세계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고 경제적 후발 상태를 벗어나게 한 산업화의 성공 다음 단계로 민주화가 마찰 없이 이행된다는 것도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1987년의 민주화 선언과 군부 독재 종식은 30년 미만의 급속한 산업화에 의해 먹고사는 문제가 확실히 해결됐으므로 이제는 민주와 자유도 같이 가져야겠다는 욕구가 분출한 결과다. 주로 대학생들의 희생이 뒤따른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그 시기를 앞당기고 소요 시간을 단축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이 과정이 현재의 다른 후발국들에도 똑같이 적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순서를 얘기하자면 산업화가 먼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화를 실현 가능한 단계가 이끄는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옛말을 인용하자면 ‘의식이 족해야 염치를 안다’는 표현이 여기에 적용된다. 이 현실적 순서를 인정한다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대나 당시의 지도자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폄하는 것은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는 모순이다.

다른 증거의 예로 세계은행이 1인당 국민소득과 민주주의 발전 정도를 연관시킨 4분위 그림을 들 수 있다. 민주화 정도는 상대적으로 높지만 산업화는 뒤떨어진 국가가 상당수 있다. 그 대표가 인도다. 반대로 산업화는 되고 있으나 민주화가 뒤떨어진 경우도 있다. 중국이 극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이 둘을 같이 충족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고, 아시아에서 일정 수준의 국가 규모를 갖춘 나라로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명실 공히 선진국의 지위에 오른 한국은 세계 경제사에 유례가 없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다. 이제는 자긍심과 책임감을 갖고 세계에 기여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참고: K속도-한국 경쟁력의 뿌리(임정덕 지음, 2022)

#이 칼럼은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선사연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임정덕 ( jdlim@pusan.ac.kr )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효원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저 서

적극적 청렴-공기업 혁신의 필요조건, 2016
부산 경제 100년-진단 30년+ 미래 30년, 2014
한국의 신발산업, 산업연구원, 1993

K속도 한국 경쟁력의 뿌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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