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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北學議) 박제가...스물아홉, 북학의 꿈
북학의(北學議) 박제가...스물아홉, 북학의 꿈
  • 박수밀
  • 승인 2022.09.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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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칼럼] 조선 후기에 한‧중 문화 교류를 막는 강력한 장애물은 중화사상에 근거한 북벌 이념이었다.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생각과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주자는 조선 사회의 의식은 한‧중 간의 정당한 문화 교류마저 가로막았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강대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조선의 가난을 해결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있었으니 그 중심에 선 이가 초정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조선 지성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목소리를 낸 열혈남아이다. 십대 후반에 백탑 근방에 사는 이덕무, 박지원을 만나 신분과 당파를 뛰어넘어 어울리며 북학의 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의지를 다져갔다. 마침내 1778년 3월 17일, 정사 체제공의 수행원이 되어 절친 이덕무와 함께 고대하던 중국 땅을 밟았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는 중국의 발달한 문물과 제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저들의 문화와 풍속을 꼼꼼히 살펴 조선에 적용하여 삶을 이롭게 할 만한 것이면 보는 즉시 적었다. 아울러 그들의 제도를 시행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아서 생기는 폐단을 보태 기록하여 책의 이름을 『북학의(北學議)』라고 썼다.

‘북학(北學)’이라는 명칭은 『맹자(孟子)』에서 “진량은 초나라 출신으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에 가서 공부했다.(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과 문화, 기술을 받아들여 조선의 삶과 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한 학자들을 북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박제가는 총 네 차례의 연행을 통해 백 명이 넘는 중국 문사들과 직접 교류하며 국제적 안목과 선진 학문을 습득했다. 조선은 그를 신분으로 차별했지만, 이방인들은 편견 없이 그의 재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는 가난한 백성의 삶을 끌어올리고 낙후된 조선을 개혁하여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자신이 뼈저린 가난을 경험했기에 인간다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衣食)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생활 도구를 쓸모 있게 활용하는 이용(利用)과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후생(厚生)이 선결되어야 정덕(正德)의 가치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잘 배워서 백성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도 훌륭한 학문과 학자들이 있고 배울 제도와 문물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오랑캐를 편든다며 손가락질했다. 조선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국과 무역하는 길 밖에 없다고 강변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당벽(唐癖)과 당괴(唐魁)라는 딱지를 붙이고 오랑캐를 추종한다고 비난했다.

화이론과 대명의리라는 도그마에 빠진 완고한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존주론(尊周論)」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첫머리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분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사전에 없앴다. 이어 청나라 왕조는 비록 오랑캐일지라도 그들의 문물과 제도는 주나라 때부터 이어온 중화의 유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한인과 만인을 분리, 중화의 피를 이은 한인까지 깡그리 오랑캐로 몰아세우며 중화의 법까지 싸잡아 배척하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성인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면 오랑캐 법일지라도 받아들인다고 하여 의리와 명분보다 백성과 나라를 우선하는 생각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한다면 저들의 선진 문명을 모조리 배운 후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자고 역설하였다.

청의 통치 세력과 문물을 분리하여 접근하는 박제가의 입장은 근본주의 화이론자들의 비난을 비껴가면서 동시에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가려는 현실적 수정주의라 부를 만하다. 비난과 오해를 막기 위해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전통적인 화이론을 옹호하면서 청 왕조는 이적이지만 청의 문물은 중화라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의 지배 이념과 청나라 선진 문물 수용의 당위성을 동시에 끌어안아야 했던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박제가의 중국에 대한 경도(傾倒)를 중국 사대주의와 자기비하라고 손쉽게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조선의 땅과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굶어 죽어가는 인민의 삶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그에겐 허울뿐인 의리와 명분보다 인민의 삶이 더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용후생을 통해 저들의 나은 점을 잘 배워 조선이 그 수준과 나란히 되기를 소망했다.

박제가의 생각은 중국의 뛰어난 문물을 직접 확인하고서 객관적으로 비교한 뒤에 나온 통렬한 자기반성의 목소리이다. 이는 자기비하가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 내부를 돌아볼 줄 알고 타자(他者)에게서도 배우려는 학인(學人)의 자세이다. 그는 지금 현실이 이전과는 다른 시대 정신을 요구한다는 점을 잘 알았다. 존주(尊周)의 의리를 절대적 가치로 붙들 것인가, 의리의 다양함으로 나아갈 것인가가 조선의 북벌과 박제가의 북학이 갈리는 지점이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 수 밀(한양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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