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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리고 나의 정체성...무엇이 '나'인가?
삶과 죽음 그리고 나의 정체성...무엇이 '나'인가?
  • 윤영호
  • 승인 2023.02.2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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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갑자기 일찍 저버린 꽃처럼, 아쉬운 생을 마감한 집안 장례식...상황에 정신이 혼미

[윤영호 칼럼] 산책을 하면서 뿌리가 드러난 나무를 발견했다. 실 가지 끝마다 지난 늦가을에 낙엽 졌던 그 자리에 또 다른 새 싹을 움티울 봄준비를 하고 있다.

보이는 잎이나 실가지 개체마다, 내 몸이 독립적인 나무의 존재, “나” 라고 정체성을 규정하는 순간, 다른 잎이나 옆에 있는 줄기는 생존경쟁대상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 입장에서는 모든 잎, 모든 가지 전부가 나의 일부요 나의 화신이다.

잎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1년이 출생과 사망으로 끝나버린 허무한 역사였지만, 뿌리 입장에서는 죽음이 없었다. 다만 머리카락이 빠진 자리에 새 머리카락이 나온 것이며, 절기에 맞춰 이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진리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너무나도 보이는 현상에 매몰되다 보니, 보이지 않는 본질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상한 세월과 단명하는 생명이 허무하고 두렵다는 단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오래 살고, 조금 더 근사하게 살려고 아등바등하며 형제 가지, 이웃 잎과 죽기 살기로 다툰다.

며칠 전, 갑자기 일찍 저버린 꽃처럼, 아쉬운 생을 마감한 집안 장례식을 마치며 황당한 상황에 정신이 혼미했다. 유가족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허무한 실존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처럼, 보이는 우리 몸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구나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가 병들고 죽는 현상에 대해 허무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의 생명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무와 다를 수 없어

그러면 무엇이 진정 '나'인가

지속적으로 새로 생겨나고 도태되는 몸 세포가 나인가? 아니면 몸을 유지하고 몸기관을 도구로 사용하면서 삶을 구현하는 의식(consciousness))이 나인가? 몸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의식이 떠나면 그저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사건 사고 때, 생사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 ‘의식이 있는가 없는 가’다.

나뭇잎과 가지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뿌리에서 단절되면 그저 낙엽이고 사목(死木)일 뿐인 것처럼, 우주에 편만하고 장구한 의식(意識)에서 단절된 몸은, 자연의 일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원소일 뿐이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빠지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평소 보이지 않던 뿌리가 진정 “나무의 존재근거” 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우리 생명의 존재근거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며 살 필요가 있다.

지난 1년동안 보이는 나뭇잎은 죽었지만, 땅속 보이지 않는 뿌리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뿌리를 보지 못하는 우리는 보이는 것(떨어지는 낙엽)만 보기에 생명이 죽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의 생명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에서 나무와 다를 수 없다. 나무의 뿌리처럼, 우리 생명의 근거가 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선험(先驗), 즉 경험이나 학습이전에 선천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 있어

그것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의식, 마음, 영혼, 성령, 불성처럼 사람이 붙여 놓은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사고하며 확증 편향적이기 쉬운 인간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개념은 한계속에 갇히고, 범주오류(category mistake)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도,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도덕경 첫머리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정한 개념과 범주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즉시 아는 것은 눈이 아는 것인가? 뇌의 시냅스가 아는 것인가? 한 마디로 눈의 망막이나 뇌세포는 의식이 활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이나 실신한 상태에서, 뇌세포나 시신경이 죽지 않았음에도 인식하지 못하지 않는가?

또한 칸트가 말하는 선험(先驗), 즉 경험이나 학습이전에 선천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제1원인이 되는 의식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나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용되는 도구와 사용하는 주체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현상은 본질에 근거하고 본질은 현상에 의해서 드러난다. 그러기에 본질과 현상이 하나요, 상대와 절대가 한 몸인 것처럼,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 인 것이다. 다만 우리의 존재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에 따라서 불안하기도 하고, 호연지기를 품을 수도 있을 뿐이다.

인간이 이름 붙인 생명활동의 근거도 하나...이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자

성경에서 아버지를 떠나 ‘집 나간 탕자비유’나 법화경에서 ‘집에 돌아온 궁자 이야기’는 크게 볼 때, 동일한 맥락의 메시지가 있음에 주목한다. 본질과 본향은 현상이나 타향과 달리 허무하지 않다. 모두가 하나로 통섭되기에 선악 분별이 없고, 에고(ego)가 없기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신으로 묘사되는 서양종교나 자연신으로 인식되는 동양종교나를 막론하고 불안을 조장하고 범주오류에 생명을 가둬서는 안된다. 생명의 제1원인을 독점하려고 해도 안된다. 분열과 대립의 프레임을 만들어 창살 없는 편견 감옥을 구축해서도 안 된다. 잎은 여럿이라도 뿌리는 한 뿌리요. 파도의 모양은 다양할지라도 그 본체인 바다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체 없는 잡념의 구름에서 벗어나 편견없이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노라면 입체감각이나 거리감각도 사라지고 내 의식 속에 세상이 하나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창조주의 호흡이 하나이듯, 인간이 이름 붙인 생명활동의 근거도 하나다. 미국의 성령과 한국의 성령이 다를 수 없고, 인도의 불성과 중국의 불성이 다를 수 없다.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자. 대결하고 싸움하는 재미 말고도, 우리가 추구해야할 재미있는 일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잎이 무성해도 뿌리가 상하면 그 나무는 죽게 되고, 나뭇잎이 상하면 그 줄기가 아프며, 그 줄기가 말라죽으면 그 뿌리도 생사의 기로에서 신음할 수 밖에 없다. 그들 생명근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윤영호<yhy321321@gmail.com>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HCN지속협 대표회장

더뉴스24 주필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 한림MS 기획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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