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 위에 서서...차분히 돌아보고 내다볼 때
백척간두 위에 서서...차분히 돌아보고 내다볼 때
  • 송혁기
  • 승인 2021.11.2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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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혁기 칼럼] 신종 감염증의 대유행으로 전 세계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 놓여 있다. 첨단의 의료기술과 비교적 잘 갖추어진 보건 시스템으로 혼신을 다해 대처했음에도, 2년이 다 되도록 온전한 해결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백신 접종률이 높은 유럽 각국에서 감염증이 다시 창궐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과연 코로나와 함께하는 일상의 회복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불안하고 암담한 심정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경제적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서울연구원의 정책리포트에 따르면 2020년 서울 음식점업의 매출은 전년 대비 13.6% 감소했으며,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 기간 27.6%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올해 들어 사회적 거리두기가 더 강화되었고 코로나 2년차에 접어들면서 손실이 누적 가중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2021년의 지표는 더 심각한 수위에 이를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혜를 모으고 역할을 나누어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정책을 입안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정치’의 진정한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눈에 들어오는 정치판의 모습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저급한 의혹과 비방들뿐이다. 내년 상반기 대통령 선거와 지방 선거까지 이어질 이 소모적인 정쟁의 와중에서 과연 희망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백 척이나 되는 높다란 장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는 형국이다.

백척간두, 그 높고도 위태로운 경지

“지금이 실로 어떠한 때인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형세가 이미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바둑돌을 쌓아 올리고 계란을 포개 놓았다는 말로도 이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국왕 정조가 물러난 신하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내린 글의 한 부분이다. 이처럼 ‘백척간두’는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비유하는 성어로 우리나라의 한문 문장에서 적지 않게 사용되어 왔고, 오늘날의 국어사전에서도 같은 의미로 설명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백척간두’를 주로 학문 혹은 사업의 성취가 지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성어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높은 곳이 위태롭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백척간두를 위태롭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은 흥미로운 언어 현상이다.

물론 ‘백척간두’를 높은 경지라는 의미로 사용한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 공풍(鞏豊)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듯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한 데에서 영향을 받아, 지금의 학문적 성취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분발할 것을 권면하는 맥락에서도 이 말을 쓰곤 했다.

백척간두에서 발을 떼면

더 이상 오르지 못할 극단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한 걸음을 더 내딛어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은 원래 불교에서 온 것이다. 주희는 이 말이 지닌 불교적 색채를 경계하면서도 학문의 끝없는 진보를 드러내기에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여 사용한 것이다.

“백척간두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경지에 오르긴 했어도 진정한 경지는 못 되네. 백척간두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이 몸에 온전해지리라.” 당나라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려면 장대에서 발을 떼어야 한다. 높디높은 백척간두 위에서 발을 떼는 행위는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유일한 것마저 놓아버림을 뜻한다. 그 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끝없이 진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쌓아올린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만나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리는 위기에 봉착했다. 참으로 높고도 위태로운 백척간두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이제 우리가 그 동안 믿고 의지해 왔던 것에서 발을 떼어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백척간두가 아닐 수 없다. 이 백척간두 위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 전에 먼저 내려놓고 결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새 길이 어디로 열려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고 내다볼 때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송 혁 기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고전의 시선〉(와이즈베리)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한국고전번역원)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공저, 돌베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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