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최근 AI 업계에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연출됐다. 앤스로픽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9월 12일 「We Must Pace the Frontier」라는 공개 글에서 프런티어 AI의 능력 향상 속도를 늦춰 안전장치가 따라올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단순한 ‘개발 중단’이 아니라 독립적인 외부 평가자를 AI 기업 내부에 두고, 민주국가의 프런티어 AI 기업들이 공통 안전기준과 통제되지 않은 발전 속도에 대한 원칙을 마련하며, 궁극적으로 국제적 협력까지 모색하자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경쟁자들의 반응이었다. 오픈AI CEO 샘 올트먼은 “프런티어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다리오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독립적인 외부 평가자 제도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와 일론 머스크도 아모데이의 방향에 동조했다.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9월 14일 아시아 증시에서 소프트뱅크가 장중 최대 13.2% 급락했고, 키옥시아 9.8%, SK하이닉스 5.3%, 삼성전자 3.7%, 도쿄일렉트론 3.7% 등 AI·반도체 관련주가 일제히 밀렸다. 시장이 두려워한 것은 AI의 종말이 아니라 ‘AI 투자 사이클의 감속’이었다.
AI판 ‘죄수의 딜레마’
그러나 워싱턴의 시계는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AI 개발 속도를 늦추면 중국에 추격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러한 움직임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AI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패권의 문제가 됐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상대가 질주한다면 누가 먼저 멈출 것인가. 이것이 미·중 AI 경쟁이 빠져든 새로운 ‘죄수의 딜레마’다.
미국도, 중국도 이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위험을 알면서도 질주한다. 역사상 군비경쟁이 그랬다. 상대가 핵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나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인류는 ‘더 강한 무기’와 함께 ‘상호확증파괴’라는 기묘한 안전장치를 발명했다. AI도 비슷한 길로 들어서고 있다.
문제는 이번 무기가 총이나 미사일이 아니라 지능 자체라는 점이다. AI가 인간의 지식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고급 사무직의 한계비용은 급락한다. 사이버 공격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게 될 수 있다. 감시 기술이 무자비한 권력의 손에 들어갈 경우 개인의 자유를 압박하는 정교한 도구가 된다. 생명과학·화학 분야의 전문지식 접근 장벽도 낮아질 수 있다.
더 근본적 문제-AI가 AI를 개선하기 시작하면 누가 운전대를 잡는가
아직 완전한 재귀적 자기개선이 현실화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AI가 코드를 작성하고, 연구를 돕고, 다른 컴퓨터 시스템과 자율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능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최근 AI 업계에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다시 커진 이유다.
중요한 것은 공포를 부풀리는 것 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공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 때 기계가 노동자를 대체하자 러다이트가 기계를 부쉈지만, 그러나 역사는 기계를 없애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기계를 인간의 생산수단으로 편입시키는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사고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교통법규와 신호등, 운전면허와 안전벨트가 생겼다.
자동차가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에 규칙이 필요했던 것이다. AI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AI 경쟁의 공식은 간단했다. 더 많은 GPU, 더 많은 데이터, 더 큰 모델, 더 많은 전력~.
그러나 AI가 기업과 공장, 금융과 의료, 국방과 행정의 의사결정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똑똑한가”에서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로,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가”에서 “언제 멈출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속도와 연산의 시대’에서 ‘통제와 안전의 시대’로 전환되는 변곡지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역사적 교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세계 패권을 잡은 나라가 언제나 모든 것을 가장 잘 만든 나라는 아니었다. 대항해시대의 패권은 바다를 지배하는 항로와 항구에서 나왔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석탄과 철도, 석유시대에는 유전과 해상 운송로, 호르무즈같은 지정학적 병목이었다. 패권은 가장 막히기 쉬운 병목지점에서 멈출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중국과 똑같이 범용 초거대 AI 모델 경쟁에 정면 승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바로 AI 패권의 ‘병목’이다.
첫째가 AI 안전과 통제 기술이다. AI의 행동을 감시하고, 권한을 제한하고, 이상 징후를 탐지하고, 필요하면 작동을 중지시키는 기술이다. 기업 데이터 유출을 막고 AI의 판단 과정을 검증하며 책임소재를 추적하는 기술도 여기에 포함된다. 앞으로 AI가 모든 산업에 들어간다면 ‘AI를 잘 만드는 기술’ 못지않게 ‘AI를 안전하게 쓰게 하는 기술’의 가치가 커질 것이다.
둘째는 피지컬 AI다. 한국은 연구실보다 공장에 강한 나라다.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배터리·물류 등 세계적인 제조 현장을 갖고 있다. AI가 화면 속에서 글을 쓰는 시대를 넘어 로봇을 움직이고 선박을 운항하며 생산라인을 제어하는 시대가 오면 이 제조 기반은 엄청난 자산이 된다.
셋째는 메모리 반도체다. AI가 현실세계 곳곳에 들어갈수록 중앙 데이터센터의 거대한 연산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장에서 데이터를 받아 즉시 판단하는 로컬 추론과 실시간 제어가 중요해진다. HBM은 물론 CXL·LPDDR (Low Power Double Data Rate,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같은 배터리 기반 기기에서 많이 사용되는 저전력 메모리)등 메모리와 데이터 이동 기술의 중요성도 커질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변화를 ‘AI 거품 붕괴’나 ‘반도체 피크아웃’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기술’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과 산업이 끝나는 것은 다르다. 증기기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기모터로 중심이 이동했고, 석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력과 함께 에너지 체계가 진화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AI의 경쟁력은 궁극적으로 ‘얼마나 크게 만들었느냐’에서 ‘얼마나 안전하게 현실에 배치했느냐’로 옮겨갈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AI 시대의 가장 값비싼 기술은 어쩌면 ‘더 빨리 가는 기술’이 아닐 수 있다.
엔진은 자동차를 움직인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있어야 그 자동차를 믿고 탈 수 있다. AI도 그렇다. 지능의 크기만 키운다고 문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통제 안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기술은 문명이 된다. 미·중이 AI 엔진의 마력을 놓고 경쟁하는 동안 한국이 브레이크와 운전대, 그리고 도로를 만드는 나라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남들이 엔진을 키울 때 우리는 길목을 지배해야 한다. 남들이 속도를 겨룰 때 우리는 통제의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남들이 AI를 말할 때 우리는 AI가 현실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의 최종 승부처는 예민한 부분에서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질문은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가”가 아니다. “누가 가장 빠르게 달리면서도, 필요할 때 멈출 수 있는가”이다. 문명의 진짜 힘은 질주하는 엔진에만 있지 않다. 브레이크를 믿고 더 멀리 갈 수 있는 능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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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