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10월9일 한글날이 다가온다. 이 기념일에 한글제정을 근대화된 오늘날 의미로 되새긴다. 한글날은 단순히 문자제정기념일로만 기억할 일이 아니다. 문해력 독점사회를 깨뜨린 지식혁명의 날이다. 580년 전 ‘지식의 해방’을 일궈낸 기적, 한글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숨은 엔진이었다.
1446년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바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일이다. 그 순간은 단순히 새로운 문자 체계가 등장한 날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구조가 바뀌는 시작의 날이었다. 지식의 소유권이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높은 교육 수준, 민주주의, 그리고 세계적 IT 강국의 위상은 사실 그날 시작된 ‘지식의 해방’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지식이 해방될 때 도약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사건이다. 당시 성경은 성직자만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었고, 신의 뜻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성경을 대중의 언어로 옮기자 상황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직접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고, 개인의 양심과 판단이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언어를 번역했지만 세종은 아예 문자를 새로 만들었다. 그것도 배우기 쉽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자였다.
근대화의 ‘디딤돌’이 된 한글의 문해율
당시 조선의 지식 체계는 한자라는 거대한 장벽 위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교육을 받은 사대부만이 문자에 접근할 수 있었고, 글을 모르는 백성은 지식에서 배제된 채 살아야 했다. 지식의 독점이 곧 권력이던 시대였다.
세종의 결단은 그 구조를 뒤흔들었다. 훈민정음은 문자 자체가 민주주의였다. 발음 기관의 구조를 바탕으로 만든 과학적 체계 덕분에 누구나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지식의 문턱을 낮춘 것이 아니라 사실상 없애버린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마뉘엘 토드는 국가 발전의 핵심을 문해율에서 찾는다. 국민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근대적 역동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한글은 조선의 가장 강력한 근대화 잠재력이었다.
이 잠재력은 20세기에 폭발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다. 흔히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기적의 밑바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있었다. 바로 한글이라는 문자였다.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 안에 거의 전 국민이 글을 읽는 사회가 되었다. 농촌에서 태어난 청년들이 공장으로 가 복잡한 기계 매뉴얼을 이해했고, 기술 교재와 산업 문서를 빠르게 습득했다. 동시에 시민들은 신문과 책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며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졌다.
문해율은 국가의 숨은 근력이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국민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학습하는 시민이다. 지식이 아래로 흐를 때 사회 전체의 역량이 상승한다. 한글은 바로 그 지식 순환을 가능하게 만든 거대한 엔진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와 디지털 역량을 가진 국가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배우기 쉬운 문자 체계 덕분에 정보 전달의 효율이 극대화되었고, 이는 정보기술 시대에 강력한 경쟁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 이상의 존재, 사회 구조를 바꾸는 기술이다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문명 도약은 언제나 ‘지식의 장벽’이 무너질 때 일어났다. 르네상스가 그랬고, 종교개혁이 그랬으며, 인쇄술의 확산이 그랬다. 한글 창제 역시 같은 맥락의 사건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혁명이 왕의 결단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스스로 지식의 문을 열어젖힌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드물다.
그래서 한글날은 단순한 언어 기념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 특권이 아니라 보편권리가 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580년 전 세종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지금 인류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문턱 앞에 서 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사회 구조를 다시 바꾸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지식 독점이 등장하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기술을 소수만 이해하는 사회는 결국 또 다른 중세로 돌아갈 수 있다.
580년 전 세종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지식은 나눌수록 강해지고, 정보는 낮은 곳으로 흐를 때 사회가 건강해진다. 세종이 꿈꾸었던 나라는 ‘지혜로운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회’였다. 그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 깊은 뿌리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민주화한 문명적 발명이다. 어진 임금 세종대왕이 백성에게 하사해준 문자선물이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토대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지금 그 문자 위에서 생각하고, 토론하고, 기술을 만들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한글날이 진정 기념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밑바닥부터 바꾼 것은 군대도, 금도, 권력도 아니었다. 백성이 글을 읽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왕으로부터 출발한 위대한 지식혁명보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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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