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종의 경제프리즘] 1914년 여름,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이 마시게 될 ‘전쟁의 독배’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못한 채 파멸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한 대공 부부의 비극에 그치지 않았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블록화된 동맹 체제라는 구조적 모순을 폭발시킨 도화선이었다.
11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또다시 소리 없는 전운에 휩싸여 있다. 과거의 전장이 진흙탕 참호와 독가스였다면 오늘날의 전장은 반도체 공급망, 핵심 광물, 관세와 보조금, 첨단기술 수출통제다. 총성은 사라졌지만 경쟁의 본질은 더욱 정교하고 은밀하게 진화했다.
‘유럽의 화약고’에서 ‘공급망의 무기고’로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세계는 오늘날 못지않은 세계화의 시대였다. 자본과 상품, 노동력이 국경을 넘어 이동했다. 그러나 높은 상호의존성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했다.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으로 유럽이 진영으로 갈라지면서 발칸반도의 작은 분쟁은 열강 간 충돌로 번졌다. 한 국가의 동원이 다른 국가의 동원을 부르고, 동맹국에 대한 지원이 참전을 강요하는 연쇄 반응이 전쟁을 세계적 파국으로 확대했다.
오늘날의 글로벌 공급망도 비슷한 역설을 안고 있다. 냉전 이후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위해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GVC)은 이제 경제안보의 핵심 전장이 됐다.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핵심 광물처럼 특정 국가에 의존하는 산업의 병목은 곧 국가의 약점이 된다.
경제적 상호의존은 협력을 촉진하는 힘인 동시에 상대방의 약점을 겨누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른바 ‘무기화된 상호의존성(Weaponized Interdependence)’이다. 공급망 재편은 새로운 경제 블록과 동맹을 만들어내고 있다.
총검 대신 자본과 기술, 포탄 대신 제도
1차 세계대전은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동시에 국가의 산업생산력과 금융·물류 역량이 승패를 좌우한 경제전쟁이었다.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로 물자와 식량 공급에 타격을 입었고, 연합국은 미국의 자본과 생산력, 물류 동원력을 바탕으로 전쟁 수행 능력을 키웠다.
21세기의 경제전쟁은 총력전의 무대를 제도와 기술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오늘날 패권국들은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관세, 첨단기술 수출통제, 산업보조금, 투자 제한 등을 활용한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은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글로벌 공급망의 방향을 바꾸는 수단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대포를 쐈다면, 지금은 기술과 공급망의 요충지를 장악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동원한다. 디리스킹(De-risking)과 디커플링(Decoupling)은 형태는 다르지만 상대의 미래 성장 기반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경제적 봉쇄라 할 수 있다.
‘각자도생’이 또 다른 파국을 부른다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어느 한 국가가 처음부터 세계적 파멸을 원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오인과 불신, 군사적 동원,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는 공포가 사태를 통제 불능으로 몰고 갔다. 대화와 타협의 공간이 사라지고 보복의 논리가 지배하면서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오늘날 경제전쟁도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 장벽을 높이고, 기술 패권을 위해 상대국을 배제하며, 공급망을 진영별로 재편하는 전략은 개별 국가에는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전략을 취하면 세계 경제 전체가 비용을 치러야 한다.
보호무역은 교역 감소와 비용 상승을 초래하고, 공급망의 중복 투자는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기술과 자본의 이동이 위축되면 세계 경제의 성장잠재력도 함께 낮아진다. 모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은 장벽이 결국 모두의 발목을 잡는 역설이다.
총성 없는 경제전쟁일수록 더욱 냉정해야
110여 년 전 인류는 참호 속에서 뒤늦게 깨달았다. 전쟁은 시작하기보다 멈추기가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강철의 참호가 아니라 관세와 규제, 반도체와 알고리즘, 공급망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앞에 서 있다.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세계화도, 무모한 각자도생도 아니다. 핵심 산업의 안보와 공급망의 회복력을 확보하면서도 경쟁이 단절과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협력의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 경제전쟁일수록 더욱 냉정해야 한다. 한 세기 전의 참호전이 남긴 교훈을 잊는 순간, 보이지 않는 경제의 장벽은 또 하나의 거대한 참호가 될 수 있다.
필자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주필 겸 금융소비자연구원장, 경영학박사
- (사)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 전 호원대학교 무역경영학부 교수
- 전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신보에이드 대표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