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세 칼럼] 한글날을 앞두고 600년의 시간을 건너온 한 장의 글씨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어사 희우정 방문기’.
1425년 세종이 형 효령대군의 정자 합강정을 찾았을 때 비가 내리자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고쳤다는 사연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고문헌이다.
그리고 이 문헌에 적힌 글씨가 세종이 직접 쓴 것인가를 놓고 오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10월 1일 국회에서는 마침내 이 문제를 학술적으로 들여다보는 ‘세종대왕 어필 규명 국회 간담회’가 열린다. 역사학·서지학·국어학·서예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문헌의 성립과 전승 과정, 서체와 필법을 검토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논쟁에서 한 걸음 떨어져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과연 세종의 글씨를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세종대왕은 우리 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 왕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군주이며 과학과 음악, 농업과 국방을 발전시킨 성군으로 배웠다. 그런데 정작 그의 손끝에서 나온 글씨 한 점을 두고 우리는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원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우리는 세종이 만든 문자를 매일 쓰면서도 세종이 직접 쓴 글씨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 문헌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고문서라고만 치부하기 어렵다. 세종과 효령대군, 희우정에 얽힌 역사적 기록과 오랜 전승에 대한 자료들이 존재하고, 여러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그 가능성을 추적해 왔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세종 친필’이라고 선언해서도 안 된다. 역사에서 믿음은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됐다는 사실과 세종이 썼다는 사실도 다르다. 종이가 15세기의 것이라고 밝혀진다 해도 누가 그 위에 글을 썼는지는 다시 증명해야 한다. 글의 내용이 세종의 시대와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이 세종의 손에서 직접 나온 글씨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국가와 학계의 냉정한 검증이다.
하나는 애국심을 앞세워 성급하게 ‘국보급 세종 친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연구할 가치조차 없는 자료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진품이라고 믿는 것도 학문이 아니고, 조사하지 않고 가짜라고 단정하는 것도 학문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원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소장자는 자료를 공개하고, 연구자는 자신의 주장을 검증받고, 국가는 과학적 조사 능력을 제공해야 한다. 종이와 먹, 서체와 문헌, 인장과 장정, 그리고 600년의 소유·전승 과정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조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여러 기관과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개적인 종합검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진실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가는가를 시험
그 결과 세종의 친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도 좋다. 그것 역시 우리 역사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발견이다. 반대로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 세종이 직접 쓴 글씨라는 충분한 증거가 확보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한 인간이 600년 전 붓을 들고 종이 위에 남긴 손의 움직임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골동품의 발견이 아니다. 왕의 글씨를 발견하는 일을 넘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한글’을 만든 사람의 체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한글날이면 우리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행사를 열고 한글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화유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교과서에 올라간 유산을 찬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기록을 찾아내고, 의문을 제기하고, 증거를 모으고, 틀렸다면 수정하고, 진실이라면 인정하는 과정까지가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 ‘세종 어필’ 논쟁의 진정한 가치는 친필 여부를 넘어선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진실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가는가를 시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이 백성에게 문자를 돌려주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세종에게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600년 동안 한 서첩이 살아남았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의심만 하며 서랍 속에 다시 넣어두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빛 아래 펼쳐놓고 끝까지 물어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한글날을 맞아 우리가 세종대왕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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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정세(allphoto@naver.com)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미디어위원장
KOICA 한남대 아시아태평양 국제협력단 부단장
전 문화일보 미디어사업부장
전 문화일보, 세계일보 편집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