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회장들 중 아주 보기드문 거액 차입사례
-통상 다른 회장들은 은행이나 증권사서 주로 필요자금 조달
-은행 가기 어려운 긴급사정 있는 듯...진짜 국세청 세무조사 관련?
-이유 놓고 개인 신규투자금, 국세청 세무조사 추징세액설 등 분분
-상속세 납부과정서 생긴 계열사의 7297억 유상감자가 주원인설 유력
-3세 승계 관련기업의 과다한 내부거래도 향후 문제소지 적지 않아
[금융소비자뉴스 정진교 기자] 일진글로벌그룹 최대주주인 이동섭 회장(55)이 그룹 주력사인 일진글로벌로부터 지난달 30일 무려 3250억원을 빌린다고 지난 2일 이 회사가 공시했다.
일진글로벌의 이 대여금 금리는 법인세법상 당좌대출이자율인 연 4.6%이고, 대여금은 대여기간 만료일 이전에 전부 또는 일부 상환이 가능하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일진글로벌이 비상장사여서 그런지 나머지 대여조건은 더 이상 공시하지 않았다.
재벌 회장들이 개인자금 소요 등으로 계열사에서 돈을 빌리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다. 하지만 빌리더라도 보통 수십억원, 많아야 수백억원 정도이지 이렇게 3000억원이 넘는 계열사 차입은 보기 드문 일이다. 최근 수년간 이런 거액차입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분 회장들은 여론이나 관계당국 등을 의식, 필요 개인자금을 은행이나 증권사 등에서 보유 주식을 담보(주담대)로 보통 빌리기 때문이다. 계열사에서 빌리는 돈은 자칫하면 공정위나 국세청 또는 언론 등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극히 조심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이 어디에 돈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길래 은행 등을 이용하지 않고 급히 계열사에서 거액을 빌리는지에 대해 의문과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진글로벌 그룹은 계열사 합산 자산이 5조원이 넘어 올해 처음으로 공정위의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된 그룹이다. 공시대상기업집단은 정부가 공인하는 ‘준(準) 재벌’로도 불린다. 올해 공시대상기업집단은 모두 102곳인데, 일진글로벌은 자산순위 102위 그룹이다. ‘재벌’ 또는 ‘준 재벌’ 반열 가장 끝자리에 올해 새로 올라섰다.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되면 일감몰아주기나 사익편취 등에 대한 규제가 크게 강화된다. 또 웬만한 계열사들의 움직임은 속속들이 공시해야한다. 이런 부담이 있는 것을 뻔히 알텐데 굳이 계열사에서 수천억원을 차입하는 것을 보면 이 회장에게 은행이나 증권사까지 가기 어려운 아주 다급한 대규모 자금소요가 생겼음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진글로벌그룹은 허진규 회장이 창업주인 전기소재전문 일진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그룹이다. 자동차 베어링에서 시작해 지금은 여러 자동차부품을 주로 다루는 자동차부품 전문그룹이라고 보면 된다.
고(故) 이상일 창업주가 1973년 설립한 봉제공장 일진물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창업주는 고려대 상대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근무하다 35세에 사업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1978년 일진단조(현 일진베어링)을 설립하며 자동차부품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테이너부품, 섀시부품사업 등도 벌이다 1994년 자동차 휠 베어링 사업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일진글로벌을 있게 한 토대를 구축했다. 자동차 차체를 연결해 차량 구동때 무게를 지지하고 바퀴 회전을 원활하게 하는 핵심 부품이다.
특히 2003년 독자개발해 현재 일진글로벌 주력제품이 된 3세대 휠 베어링은 글로벌시장 1위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2011년에는 베어링아트를 설립, 철도차량, 전기차, 로봇 등에 장착되는 산업용 베어링까지 생산하고 있다.
전체 계열사 9곳의 영업실적과 재무상태는 대부분 극히 양호하다. 특히 일진글로벌의 고속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다. 현금보유도 상당해 일진과 일진글로벌, 일진글로벌홀딩스, 일진베어링, 베어링아트 등 감사보고서가 공개되는 5개사의 현금및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만 작년 말 기준 1조4936억원에 달한다.
이 회장은 2023년 부친인 창업주가 작고하자 곧바로 경영권을 승계했고, 1년 뒤인 2024년 6월에는 회장 자리에도 올랐다. 사실상 지주사 격인 일진 지분 70%를 확보했고, 일진글로벌 지분 30%, 일진베어링 지분 80%도 갖고있어 현재 지배력은 확고하다.
수천억원에 달한다는 부친 상속세 문제도 2024년 일진글로벌홀딩스가 실시한 무려 7927억원 규모의 유상감자 덕에 거의 해결된 것으로 알려진다. 호실적에 재무상태가 워낙 좋다보니 이 회장이 받는 주주배당이나 연봉도 상당하다.
이 회장이 일진과 일진베어링에서 올해 초 받은 작년 결산배당만 93억원에 이르고 본인이 직접 대표이사를 맡고있는 일진, 일진글로벌, 일진글로벌홀딩스에서 받는 연봉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비상장사들이어서 연봉은 공개되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면 이 회장에게 수천억원의 급전 소요는 도저히 있을 것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3250억원이나 갑자기 계열사에서 빌린다고 하니 갖가지 설(說)만 무성한 상태다.
우선 이 회장 개인 차원의 신규사업 투자나 친인척 간 지분 정리, 혹은 개인 유동성 다변화를 위한 재원확보 차원 아니냐는 추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용도들이라면 차입규모가 너무 크다.
또 그런 용도들이라면 금융기관에서 천천히 절차를 밟아 빌리면 가장 무난한데, 굳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이 용도들은 아니라는 관측이 더 많다.
그래서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상속세 관련 세무조사에 따른 대규모 급전 소요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국세청은 고(故) 이상일 창업주 별세 이후인 2024년 6월부터 일진글로벌그룹을 상대로 강도 높은 상속세 세무조사를 진행했다. 세무조사 결과로 이 회장이 현재 거액의 추징세액을 물어야하는 상황 아니냐는 추정이다.
물론 오너일가 간의 재산 분할, 연부연납 세액납부 등 상속세 관련 최종 정산자금이 더 필요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8000억원에 가까웠던 2024년 유상감자 규모를 감안하면 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는 관측들이 많다. 특히 2024년 대규모 유상감자가 국세청에 제대로 걸린게 아니냐는 관측들이 적지 않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그룹사옥인 일진빌딩 관리기업인 일진글로벌홀딩스는 과거부터 현금 유동성이 매우 풍부한 그룹의 핵심 돈줄이었다. 창업주가 소유하던 이 회사 지분 60%가 상속 과정에서 이 회장에게 42% 등 오너일가에 나눠 상속되었는데, 회사가 이 상속지분 전량을 주당 약 598만원, 총 7927억원에 자사주로 매입해 소각한 것이 이 유상감자의 줄거리다.
이 돈이면 상속세 해결에 충분한 것으로 당시에 평가됐다. 오너일가 상속세 해결과 이 회장 2세체제 구축에 일진글로벌홀딩스가 전적으로 총대를 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유상감자로 지주사격인 일진의 이 회사 지분율이 30%에서 70%로 높아지면서 일진글로벌홀딩스는 일진의 종속자회사로 신분도 바뀌었다. 준 지주사 체제 구축에도 기여한 것이다.
이 유상감자와 일진 중심의 지배체제 구축 등을 국세청은 상세히 들여다 보았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우선 의제배당에 따른 개인주주 세금 부과 문제다. 유상감자로 주주가 받은 대가가 주식의 취득가액을 초과하는 경우, 세법상 이를 의제배당으로 보아 배당소득세(금융소득종합과세 포함)가 부과된다. 오너일가가 적법한 세율에 따라 세금을 모두 신고·납부했다면 절차적 리스크는 낮아진다.
고가 감자에 따른 증여세 이슈도 있다. 만약 유상감자 과정에서 특정 오너일가의 지분만 더 비싼 가격에 사주었거나(고가 감자), 지분율과 다르게 특정인에게만 감자 혜택을 몰아준 불균등 감자가 있었다면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지분가치 희석에 따른 증여세 부과 대상이 된다.
비상장 주식인 일진글로벌홀딩스의 주식 가치를 세법상 '보충적 평가방법' 등에 맞추어 공정하게 산정했는지도 핵심 규명 과제다. 다시 정리하면 오너일가의 상속세 재원 마련 등을 위해 기업 자금을 무리하게 편법동원했는지 여부를 세무당국이 정밀하게 들여다 보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거액의 추징금이 발생했을 수 있지 않느냐는게 이 추정의 근거다.
그룹이 올해부터 공정거래법상 사익편취규제대상 그룹이 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공정위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8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오너일가에 지원해준 행위가 정상적인 경영활동 범위를 벗어나 오너가에 과도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 부당지원행위로 판단될 경우 공정위가 거액 과징금이나 검찰 고발초지 등을 할 수 있다.
또 감자는 주총 특별결의를 거치면 형식요건은 충족된다. 하지만 회사 재무건전성을 해칠 정도로 무리하게 현금을 고갈시켜 오너일가 사익에 동원되었다면 상법 및 형법상 회사기회 유용 및 업무상 배임죄 등 경영진의 사법적 책임도 피하기 어렵다.
물론 꼭 이렇게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국세청이 세무조사 과정에서 이런 문제들을 적발했다면 이렇게 파장이 이어질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다소간의 문제가 적발돼 상당한 추징세액을 물어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3250억원은 너무 큰 돈이다. 이 때문에 국세청 거액 추징설이 유력하게 나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세청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 회장이 급전이 필요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일진글로벌그룹은 장사가 아주 잘되고 돈도 잘버는 우량그룹이지만 이 문제 말고도 다른 우려거리가 또 하나 있다. 현재 ‘3세 승계용’ 기업으로 유력시된다는 베어링아트의 과다한 내부거래 문제다.
베어링아트는 이 회장의 두 자녀인 이기륜-이기원씨가 각각 40%, 30%씩의 지분을 갖고있는 사실상 3세 개인기업이다. 나머지 30%는 이 회장 세 누이가 각 10%씩 갖고 있다. 여기에다 창업주는 작고 전인 2020년 자신이 보유하던 일진글로벌 지분 60% 중 40%를 베어링아트에 넘겼다.
이를 통해 오너3세 → 베어링아트 →일진글로벌로 이어지는 우회지배구도도 완성되었다. 사실상 베어링아트를 통해 3대 대물림을 위한 정지작업이 거의 완료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기업이 계열사들과 내부거래가 많다면 공정위가 개입할 수 있다. 올해부터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되었기 때문에 공정위가 문제의식을 가지면 직권으로 조사에 들어갈 수 있다.
실제 베어링아트는 작년 총매출 5659억원 중 약 23%에 달하는 1298억원을 일진베어링과 일진글로벌을 통해 올렸다. 해외 계열사 거래 795억원까지 포함하면 특수관계자 매출비중은 41.4%, 2340억원에 달한다.
공정위의 일감몰아주기 내부 판단기준이라는 내부거래금액 200억원, 매출대비 12%선을 훨씬 넘는다. 실질적인 내부거래 의존도가 상당한 편이다. 공정위는 현재 이 거래들이 ‘부당한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계열사들이 베어링아트로부터 부품을 통상적인 시장가격보다 너무 비싸게 사주었거나(통상 7%이상) 다른 경쟁업체에 발주할 수 있는 물량을 합리적 비교나 검토없이 오너3세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전량 몰아주었다면 과징금 부과나 검찰고발 조치 등을 당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일진글로벌과 베어링하트는 하청업체를 상대로 한 일방적 단가인하 및 물량 이관 등 갑질 의혹으로 국회 국정감사 증인 채텍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외부 고발이나 민원 제기는 공정위 직권조사 착수의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기존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에다 올해 정부 공인 ‘준재벌’(공시대상기업 집단) 지정까지 겹치며 그동안의 ‘온상’속에서 호된 시험대 위로 올려진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일진글로벌은 초우량그룹이지만 9개사 모두 비상 장에다 오너일가 내부지분율도 높은 등 그동안 너무 폐쇄적이었고, 문제소지가 적지 않았는데, 올해부터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되면서 문제들이 수면위로 속속 부상하고 있는 것”이라며 “특히 대규모 유상감자부터 가 문제가 될 소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